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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session 14

아지크롤아지 가브크롤

trigger warning : 합의되지 않은 성관계 묘사가 있습니다




그날 이후 가브리엘은 감방에 올 때마다 크롤리에게 같은 짓을 하진 않았다.

 

 

적어도 절반 이상은 칼이나 채찍을 꺼내들며 똑같은 질문만을 반복했다. 하지만 이젠 그마저도 형식적인 절차인 듯했고, 대천사는 이 모든 일들에 그저 몹시 따분해 보였다.

 

 

그때 이후 크롤리가 조금 침착함을 되찾았을 때, 자신이 자백을 한 거나 다름없음을 깨닫자마자 공포에 질렸고 – 크롤리는 다시 침착함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아지라파엘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비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둘 사이는 적보다 훨씬 깊은 관계임을 가브리엘에게 확인시켜 준 꼴이었다.

 

 

크롤리는 가브리엘이 다음번에 감방에 돌아왔을 때 엄청난 안도감을 느꼈다... 대천사가 축성된 채찍을 꺼내며 자신이 자백하길 다시 요구했던 것이다.

 

 

짐작컨대 천사를 위해 흘린 눈물과 애원들은, 천사에게 유죄판결을 내리기엔 여전히 충분한 증거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어쩌면 가브리엘은 크롤리가 아지라파엘을 위한다는 증거만으로는 부족했을 수도 있었다. 아지라파엘 또한 크롤리를 위한다는 증거가 필요한 거일지도 몰랐다.

 

 

크롤리의 무너지고 절망적인 말들은 대천사에게 그저 쓸모가 없을 가능성도 있었다 – 뭐가 됐든 증거로 쓸 수 없었을 테니까. 들었던 말로 상황을 고려해 봤을 때, 대천사는 자신이 한 일을 아무도 알기를 원하지 않는 듯 했다. 그래서 아마 크롤리의 필사적이고 자백이나 다름없던 대답을 천국에 알리는 위험은 감수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야 어떻게 그 자백을 얻게 됐는지 상황을 설명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

 

 

크롤리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가브리엘이 이제 진실을 알게 됐다는 것만큼은 알고 있었다.

 

 

그것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둘 모두 매번 심문이 어떻게 끝날지도 이미 알고 있었다 – 가브리엘은 불만족스러워하며 떠나고, 크롤리는 만신창이로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는 채로 끝날 터였다.

 

 

가브리엘이 질문도 하지 않고...심지어 아지라파엘의 이름조차 언급하지 않을 때면...크롤리는 무슨 일이 닥칠지 알고 있었다.

 

 

이 만남들에서...가브리엘은 불만족스럽게 떠날 생각이 없었다.

 

 

가브리엘의 강한 손이 크롤리의 피부 위로 미끄러지듯 움직이며 느긋하고도 여유 있게 몸을 더듬었고, 가브리엘은 원하는 자세대로 악마를 갖고 놀았다. 가브리엘은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크롤리는 완전히 가브리엘의 자비 하에 있었고 대천사는 자비라곤 없었다. 크롤리가 싸우든, 울든, 빌든 상관없었다. 눈물과 애원들은 가브리엘의 즐거움을 부채질할 뿐이었다 – 그러지 않을 때면 그 행동들은 대천사를 화나게 했고, 크롤리는 세게 뺨을 얻어맞거나 더 심한 벌을 받아야 했다. 자신을 방어하려는 눈멀고 약한 시도들은 소용이라곤 없었으며 가브리엘을 더욱 분노케 하고, 더욱 폭력적으로 만들 뿐이었다. 크롤리는 절박하고 본능적인 노력들에 대한 대가를 매번 치러야 했다.

 

 

낙담과 패배감에 잠겨가며, 크롤리는 서서히 반항을 멈췄다. 쉬운 거라곤 없었으나 가브리엘이 말한 대로 따르는 편이 더 편했다. 대천사가 원하는 대로만 하면 심문은 더 빨리 끝났고, 다음번에 또 오기 전까지 가버리곤 했으니까... 크롤리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고 떨리는 입술로 쏟아져 나오는 애원을 항상 참을 수도 없었다 – 그럼에도 가브리엘의 명령을 따르려고 최선을 다했다.

 

 

“뒤돌아.”

 

 

“무릎 꿇어.”

 

 

“고개 숙여, 이 쓸모없는 악마 계집.”

 

 

그리고 처음으로 나직하고 거의 부드러운 목소리의 명령이 들렸다.

“날개를 보여 다오, 아가야...”

 

 

가브리엘이 잡아먹을 듯이 그의 주위를 돌며, 이번엔 뭘 할지 천천히 결정하는 동안 크롤리는 무릎을 꿇은 채 떨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대천사의 선택에 크롤리의 속이 조여들었고, 가슴속에 차가운 두려움이 똬리를 틀었다. 이곳에 있던 내내 그의 날개는 숨겨져 있었다. 크롤리는 그것만큼은 가브리엘조차도 넘고 싶어 하지 않는 선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점점 확실해졌다.

 

 

그런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네?” 그는 공포가 섞인 분노로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얼굴로 날아온 주먹 때문에 크롤리는 숨이 멎을 뻔했고, 뒤이어 가브리엘이 머리채를 쥐고 고개를 뒤로 당기자 두피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대천사는 낮고 위협적으로 악마의 귀에 대고 으르렁댔다. “방금 뭐라고 그랬지?”

 

 

“죄-죄송합니다,” 크롤리가 겨우 내뱉었다. 심장이 마구 뛰었다.

“제발, 제 말은... 그러지 마요...”

 

 

“그렇게 하게 만들어 주지.” 가브리엘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그리고 크롤리, 강제로 명령에 따라야 한다면, 상황은 훨씬 나빠질 거란 걸 네놈도 알 텐데.”



사실이었다. 이 감방에서 크롤리는 무력했다. 가브리엘은 무엇이든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었다. 대천사는 단순히 손가락을 한번 튕김으로서 크롤리를 고통스럽고 굴욕적인 자세로 묶어둘 수 있었다. 강제로 눈을 뜨게 하는 것도, 움직일 수 없게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이었다. 대천사가 크롤리의 날개를 영적 영역에서 육체적 형태로 강제로 끌어낼 수 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가브리엘은 어떻게 해서든 크롤리의 날개를 손에 넣게 될 것이다.

 

 

크롤리는 가브리엘이 자신에게 격노하지 않는 편을 택했다.

 

 

공포에 숨이 막히는 걸 느끼며 크롤리는 명령에 복종하여 날개를 펼쳤다.

 

 

“제발,” 차가운 공포가 가슴속을 채웠고, 그는 빠르게 속삭였다. “부탁해요, 하-하지...”

 

 

크롤리의 애원은 놀란 비명으로 갑자기 끊겨버렸다. 가브리엘이 그의 뒷목을 세게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하더니 칼라의 버튼들을 연속으로 눌렀던 것이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동시에 배신감을 느끼며, 크롤리는 다가올 고통에 마음의 준비를 했다.

 

 

말한 대로 했잖아, 복종했잖아!

 

 

고통은 오지 않았다.

 

 

적어도 칼라에서는 오지 않았다.

 

 

가브리엘의 손길은 잔인했고 탐욕스러웠다. 대천사는 크롤리를 강간하는 동안 그의 날개를 움켜쥐고 사납게 비틀었다. 가브리엘이 크롤리의 지치고 멍든 몸에 세게 추삽질을 하는 동안, 대천사의 손가락 사이로 몇 움큼의 깃털이 찢겨져 나갔다.

 

 

“제발,” 크롤리가 괴로움에 울부짖었다. “제발 그만...”

 

 

“닥쳐.”

 

 

가브리엘은 가쁜 숨으로 낮게 명령하며 크롤리의 왼쪽 날개 아래를 주먹으로 세게 내리쳤다. 폐에서 숨이 빠져나가고, 학대받은 모든 사지에 전기적인 고통이 느껴질 정도였다. 파정하기 직전, 가브리엘은 크롤리에게서 자신의 것을 빼내더니 일어섰고 - 대신 크롤리의 날개에 사정했다. 크롤리는 모멸감에 잠겨, 손에 얼굴을 묻고 목에서 올라오는 흐느낌을 억누르려고 애를 썼다. 가브리엘이 앞에 다가오더니 몸을 숙였다. 대천사는 크롤리의 얼굴에서 손을 쳐내곤 턱을 잡아 강제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네놈에게 딱 어울리는 모습이로군.” 대천사는 너그럽게 알려주며 손을 뻗어 크롤리의 어깨에서부터 날개 위쪽까지 부드럽게 훑었다. 크롤리는 몸을 피하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몸서리를 쳤다.

“구역질나고 더러운 악마 창녀 같으니.”

대천사는 날개를 따라 내려오는 뼈의 가장자리를 단단히 그러쥐더니 악마를 더 가깝게 당겨 귀에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하지만 네놈은 나의 작은 악마 창녀다, 크롤리. 날개는 그대로 두도록. 내가 그것들을 다시 치워버릴 때까지 말이다. 네놈은 나의 소유물이니까. 네놈한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내가 결정한다. 맞나?”

 

 

크롤리의 심장이 가라앉았다. 강간으로 인한 고통과 수치에도 불구하고, 그는 감히 날개를 숨길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크롤리는 이제야 가브리엘이 칼라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차렸다. 자신이 날개를 숨기려고 한들 이젠 불가능하리라.

 

 

“대답해.”

 

 

가브리엘이 인내심을 잃고 경고했다. 크롤리는 질문을 기억해내려고 최선을 다했다. 마침내 그는 수치심과 패배의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가브리엘의 고통스러운 손아귀에 턱이 잡힌 탓에 말이 흐렸다.

 

 

가브리엘은 거칠게 악마를 놔주고 아무 말 없이 유유히 감방을 나갔다. 크롤리는 가브리엘의 체취와, 욱신거리는 날개를 적시고 있는 얼룩들로 범벅이 된 채로 남겨졌다.

 

 

다음번에 가브리엘이 감방에 들어왔을 때 그는 문을 이용했다. 크롤리는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고, 차갑고 메스꺼운 공포에 압도된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가브리엘은 문 근처에 서있었다. “이리로.” 명령이었다.

 

 

크롤리는 망가지고 찢어진 몸과 날개의 고통으로 얼굴을 찡그리며 간신히 일어섰다. 그는 가브리엘의 의도를 확신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이리 오라고 했다.” 가브리엘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차가웠다.

“내가 다시 말하길 원하진 않겠지.”

 

 

크롤리는 재빨리 최대한 다가갔다. 가브리엘이 팔을 잡고 남은 거리를 좁히며 확 당기자 움찔했으나 저항하진 않았다. 가브리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대천사는 팔을 놔줬고, 크롤리는 곧이어 닥칠 끔찍한 일이 뭐가 됐던 간에 마음의 준비를 하며 떨면서 서있었다. 가브리엘의 손이 닿기 직전까지 얼굴 가까이 오는 게 느껴지자 긴장이 됐다. 그리고 치유의 은총이 지닌 온기가 대천사로부터 크롤리의 몸, 날개, 눈으로 흘러들어왔다...

 

 

눈이라니.

 

 

갑자기 시력이 돌아오면서 크롤리는 숨이 막혔다 – 밝고 격렬하고 순간 압도적이었다. 새롭게 만들어진 눈이 적응되는 동안 그는 눈을 깜빡였고, 초점이 가브리엘에 맞춰지면서 몸을 가눴다. 오랫동안 크롤리는 당황에 빠져, 믿을 수 없다는 듯 대천사의 얼굴을 쳐다보며 뭐가 뭔지 알아내려고 했다.

 


가브리엘은 분노에 차서 입을 꽉 다문 채 악마를 노려봤다 – 그리고 크롤리는 애초에 왜 눈을 빼앗겼는지 단번에 기억해냈다.

 

 

크롤리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즉시 시선을 아래로 떨궜으나, 가브리엘은 크롤리의 팔을 거칠게 잡아 앞으로 당기며 다가왔다. 대천사는 조용하게 웃으며 자유로운 손으로 크롤리의 머리칼을 쓸어주더니 꼼짝 못하게 머리채를 단단히 움켜잡았다.

 

 

“정말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아가야?”

 

 

“아니요,” 크롤리는 눈을 감고 최대한 고개를 저으며 속삭였다.

“아니요, 못 한다는 거 아-압니다...”

 

 

“좋아.” 가브리엘의 거만한 목소리에는 인내심이 있었다.

“그럼 기억나게 해다오, 크롤리... 내가 애초에 네 눈을 뺏었던 이유가 뭐였을까?”

 

 

“죄-죄송합니다,” 거칠고 떨리는 목소리로 크롤리가 속삭였다. 공포로 숨도 쉴 수 없었고 눈은 꼭 감은 채였다.

“일부러 그랬던 건 아니에요, 실수였어요, 제발...”

 

 

가브리엘이 갑자기 몸을 돌려 문 옆 벽에 크롤리의 등을 세게 떠미는 바람에 마지막 말은 끊겨버렸다. 날개가 차가운 돌벽에 부딪혀 망가졌고 가브리엘의 몸은 바로 코앞에 있었다. 크롤리는 질식할 것 같았다. 그는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자신이 눈을 뜨지만 않는다면 실수로 다시 눈을 마주쳐 대천사를 더욱 열 받게 할 위험은 없을 테니까.

 

 

가브리엘은 확실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눈 떠.” 대천사의 명령이었다.

 

 

크롤리는 필사적으로 시선을 내리깔며 억지로 명령에 복종했다. 가브리엘의 축성된 칼끝이 눈 바로 앞에 있는 걸 보자 심장이 고통스럽게 조여들었다. 칼이 뺨을 스치자 뜨거우면서도 따끔거렸고, 크롤리는 흐느낌을 참으며 나오기 직전의 애원을 억누르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겨우 방금 전에 네놈 눈을 돌려줬다, 크롤리.”

가브리엘은 부드럽게 조롱하며 알려줬다.

“벌써 도로 빼앗아야 할 것 같은데? 눈을 빼내는 데는 성수도 필요 없지.”

 

 

“안 돼요,” 크롤리가 속삭였다. 얼굴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린 눈물은 칼날에 떨어지며 멈췄다. “안 돼요, 제발... 일부러 그런 게...”

 

 

“5초전에 눈을 돌려받았는데 벌써부터 규칙을 어기고 있군.”

 

 

“죄송해요,” 크롤리가 흐느꼈다. “죄송해요...”

 

 

“허락도 없이 지껄이고, 나한테서 벗어나려고 했지. 네놈 따위가 나랑 동등하다는 것 마냥 눈을 쳐다보기까지...”

가브리엘은 비난을 퍼부었고, 크롤리의 화끈거리는 피부에 칼날이 더욱 가깝게 붙어왔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 것 같나?”

 

 

크롤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대천사는 갑자기 칼을 떼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며 크롤리의 팔을 놓아줬다. 크롤리는 숨을 헐떡이며 약간 비틀거리더니 등 뒤의 벽에 손을 대고 겨우 버텨 섰다.

 

 

부드럽게, 가르쳐 주듯 가브리엘은 말을 고쳤다.

네놈이 어떻게 해아 할 것 같나?”

 

 

크롤리는 재빨리 차가운 돌에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몸을 떨면서 절박하게, 그 말만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가브리엘이 웅크리고 앉아 악마와 눈높이를 맞추며 마주보았다. 크롤리는 조심스럽게 대천사의 완벽한 가죽 구두에 시선을 맞췄다.

“방금 자네한테 선물을 줬지 않나, 크롤리.” 대천사가 상기시켰다.

“계속 가지고 싶나?”

 

 

크롤리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요, 제발...”

 

 

“그럼 뭐라고 말해야 할까?”

 

 

잠시 시간이 걸렸으나 크롤리는 곧 알아차렸다.

“가-감사합니다?” 크롤리가 중얼거렸고, 그 다음엔 좀 더 확실하게 속삭였다.

“감사합니다. 다시 보게...해 주셔서, 눈을 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브리엘은 오랫동안 악마를 바라보기만 했고 크롤리의 심장이 공포로 빠르게 뛰었다. 자신이 너무 심하게 일을 망친 나머지 방금 돌려받은 시력을 다시 잃을게 분명했다.

 

 

멍청하고 쓸모없는 하찮은 창녀야, 다 네 탓이야.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니...

 

 

가브리엘은 조심스럽게 검을 치우더니 잠시 침묵하며 크롤리를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한손을 뻗어 악마의 뺨을 감쌌다. 자신의 얼굴을 쓸어주는 가브리엘의 엄지손가락이 완벽하게 치유된 금빛 눈 밑에 있는 눈물자국을 닦아주는 동안, 크롤리는 저항하지 않으며 가만히 있었다.

 

 

“봐라, 이제 훨씬 낫구나, 아가.” 대천사는 흡족해하며 거의 따뜻하게 말했다.

“이제야 배우기 시작하는구나. 그럼 나도 널 해칠 필요가 없지.”

가브리엘이 일어서자 크롤리는 안도감으로 거의 쓰러질 뻔했다. 가브리엘은 한동안 그를 내려다보며, 마치 순종적인 개를 쓰다듬는 것처럼 크롤리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이제 우린 훨씬 더 사이좋게 지낼 수 있겠지...그렇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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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롤리는 이게 좋은 생각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난 네 죄수여야 되잖아.” 크롤리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가장 좋아하는 저녁 재킷을 입고 있는 아지라파엘을 상기시켰다.

“날 좋아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데이트라도 하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니까!”

 

 

“데이트 아니야.” 아지라파엘은 약간 당황해하며 우겼다.

“최소한 그들이 보기엔 아니야. 이건– 식사하러 가는 거야. 완전히 나 혼자 자주 즐기는 거라니까.” 천사는 거울에서 몸을 돌리더니 거리를 좁히며 다가왔다.

“넌 그냥...이번엔 나랑 같이 가게 된 거뿐이야. 내가 나가 있는 동안 너를 집에 혼자 내버려 둘 순 없잖아, 그치? 만약에 누가 묻는다고 한들 우린 완벽하게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

아지라파엘은 크롤리 옆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친구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가볍게 키스했다. 고백을 속삭이는 천사의 눈이 반짝거렸다. 

“사실 물론 데이트 맞아.”

 

 

천사의 기쁨은 전염성이 있었고 크롤리는 한숨을 쉬며 눈을 굴렸다.

“아, 알았어. 좋아. 지금 있는 네 개의 벽이 아닌...다른 네 개의 벽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괜찮긴 하겠다.”

 

 

“드라이브도 하자.” 아지라파엘이 말했다.

 

 

“바로 그거지.” 크롤리는 씩 웃으며 동의했다.

 

 

이번에는 크롤리도 너무 많은 기적들로 지칠 일이 없었다. 크롤리는 도시 반대편에 있는 조용하고도 낭만적으로 빛나는 작은 이탈리아 레스토랑으로 가는 길을 진심으로 즐겼다. 둘이 전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던 곳이었으나 아지라파엘은 이곳의 긍정적인 리뷰를 읽었던 적이 있었고, 그 리뷰들은 상당히 정확한 걸로 판명이 났다.

 

 

음식도 좋았고, 와인은 더 좋았다. 낭만적인 분위기는 크롤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유혹적이었다. 날개는 마침내 안전하게 감춰져 있었다... 어두운 조명 덕에 아무도 목의 칼라를 눈치 챌 리도 없었다... 아지라파엘은 몇 주 만에 본인이 직접 준비하지 않은 첫 식사를 기분 좋게 즐기고 있었다.

 

 

“이렇게 있을 수 있다니 정말 좋다.”

 

 

아지라파엘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그는 테이블 위로 손을 뻗더니 크롤리의 손이 놓여 있던 곳보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멈췄다. 천사는 입술을 깨물며 크롤리에게 부드럽고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크롤리도 미소를 돌려주며 손가락 사이의 공간을 슬프게 내려다봤다. 이해할 수 있었다. 만일을 대비해서, 지금의 데이트는 데이트로 보이지 말아야 했으니까. 자신이 손을 움직여 천사의 손을 잡아줄 수 없다면... 이 순간만큼은 아지라파엘의 눈 속에 반짝이는 맹세만으로도 충분했다.

 

 

크롤리는 기다릴 수 있었다.

 

 

그들은 한 시간 정도 식사를 계속했다. 아지라파엘은 이제 막 메인요리를 끝냈고 크롤리는 두 번째 와인 잔을 반쯤 마시고 있었다. 크롤리는 자신의 육체가 인간다워질 거라는 생각이 옳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토록 적은 양의 와인으로도 따뜻해졌고 노곤해지며 즐거웠으니. 자신의 천사와 함께 완벽한 저녁을 즐기면서, 크롤리는 평온함과 행복을 느꼈다.

 

 

그리고 순식간에 모든 게 산산조각이 났다.

 

 

“안녕, 아지라파엘.”

 

 

가브리엘이 그들 바로 사이에 나타나더니 손을 튕겨 기적으로 의자를 만들어내서 앉은 것이다. 크롤리의 즐거웠던 작은 취기는 차가운 공포에 휩싸여 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자넨 찾기 힘든 천사네, 알고 있나?” 

가브리엘은 진심이라기보다 가볍게 악의 없이 놀리듯 아지라파엘을 향해 말했다.

“서점에 갔는데 자네가 없더군.” 

대천사의 시선이 크롤리를 향했고, 순간 크롤리는 심장이 멎는 기분이었다. 크롤리는 즉시 시선을 탁자 한가운데 있는 작은 꽃 장식에 고정시켰다. 하지만 여전히 가브리엘이 못마땅해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제 이걸 먹이기까지 하나?”

 

 

“음, 저는 가끔 먹어야 하거든요.” 아지라파엘은 놀랄 정도로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니지.” 가브리엘은 아지라파엘을 날카롭게 바라봤다.

“정확히는 안 먹어도 되잖나.”

 

 

“먹는 게 좋거든요.” 아지라파엘이 고쳐 말했다.

“그리고 제가 책임진 자를 혼자 내버려 둘 순 없지 않습니까? 인간들은 관습 때문인지 제 식사만 챙기고...동행자는 아무것도 사주는 걸 매우 이상하게 여기더군요. 그래서 제가 먹을 때 그도 먹는 거고요.”

 

 

가브리엘은 그 개념이 어려웠는지 얼굴을 찌푸리더니 마침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이상하고 멍청한 인간다운 방식으로 말은 되는 것 같군.”

대천사는 눈을 굴리며 거만하게 손을 저었다.

“알겠지만 자네는 나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인간들이랑 보내니까. 다행스러운 일이지(thank God).”

 

 

불과 몇 피트 떨어진, 곧 닿을 것만 같은 대천사의 존재는 크롤리의 속을 메스껍게 만들었다. 가브리엘의 손이 아지라파엘의 눈을 피해 식탁보 아래로 미끄러지더니 크롤리의 다리를 단단히 감아쥐었을 때, 크롤리는 와인과 음식 몇 조각을 먹었던 걸 몹시 후회했다. 삼킨 음식들이 다시 모습을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크롤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몸을 피하거나, 어떤 반응도 보이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선글라스가 몹시 고마웠다. 지금 자신의 눈에는 압도적인 공포가 틀림없이 흘러나오고 있을 터였다. 가브리엘은 천천히 손을 위로 미끄러뜨리더니 엄지로 크롤리의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었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아지라파엘과 평화롭게 대화를 하는 동안, 크롤리는 입술 안쪽을 깨물며 구역질이 몰려오는 걸 안간힘을 다해 억눌렀다.

 

 

“그래, 잘 돼가고 있나? 칼라의 새 설정에 아무 문제는 없고?”

 

 

“네, 문제는 전혀 없습니다.” 아지라파엘이 단언했다. “아주 잘 되더군요.”

아지라파엘은 크롤리를 곁눈질했고, 크롤리는 가브리엘의 기분을 맞춰 주기 위한 차가운 태도 뒤에 숨은 천사의 근심을 볼 수 있었다. 아지라파엘은 크롤리가 이 상황을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 괜찮기는 한지 알아보려 하고 있었다.

 

 

크롤리는 그저 아무 말 없이, 움직이지도 않으며 대화가 끝나기만을 기도했다.

 

 

가브리엘이 사라져야만 괜찮아지리라.

 

 

하지만 그때, 가브리엘이 크롤리를 다시 바라보았다...대천사는 못마땅한 듯 인상을 쓰고 있었다.

 

 

“칼라설정이 좀 낮은 거 아닌가?”

 

 

“공공장소에서 높일 순 없잖습니까.” 아지라파엘이 주장했다.

“저 비참한 것이 저녁 식사 내내 고통에 시달리길 원하진 않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테니까요. 어찌 됐든 저놈은 얌전히 굴고 있어요. 만약 안 그런다면, 순식간에 상황이 바뀌는 걸 본인도 알겠죠. 그렇지, 크롤리?”

아지라파엘은 의미심장하게 재킷 주머니를 두드렸다.

 

 

“네.” 크롤리는 고개도 들지 않고 거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크롤리는 칼라의 리모컨이 지금 아지라파엘에게 없으리란 걸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가브리엘은 의심에 찬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크롤리를 다시 돌아봤다. 크롤리는 심장이 마구 뛰는 걸 느끼며, 그저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내리깔고만 있었다. 온몸이 신경과 분리되어 떨리는 것 같았다. 가브리엘이 크롤리의 얼굴로 손을 뻗는 순간 악마의 심장이 곤두박질쳤다. 대천사는 그의 선글라스를 벗겨 아지라파엘 앞에 내려놓았다.

 

 

“아지라파엘, 이것의 응석을 너무 받아주는군.” 가브리엘이 한마디 했다.

“실내에서, 그것도 밤에 이딴 건 필요 없다. 인간이 이놈이 뭔지 알리는 없겠지만. 그리고 이것이 만약 자신의 소름끼치는 악마의 눈을 수치스러워한다면- 당연히 그래야지.”

 

 

크롤리는 고개를 들지도 못하며 시선을 식탁의 장식품에 고정시켰다. 가브리엘을 쳐다보는 건 당연히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아지라파엘을 쳐다보는 것도 위험했다. 자신들의 말없는 눈빛 교환에서 가브리엘이 뭘 알아챌지 몰랐다.

 

 

아지라파엘이 자신의 눈에서 뭘 보고 있을지 궁금했다.

 

 

아지라파엘의 어조는 곤두서 있었고 날카로웠다 – 천사가 매우 화가 났지만, 그걸 나타내지 않으려고 애쓸 때 내는 목소리임을 크롤리는 알고 있었다. 가브리엘의 비난에 아지라파엘은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대답했다.

 

 

“자신의 악마 같은 모습에 대한 수치심은 고무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아지라파엘이 지적했다. “만약 이놈이 수치스러워하며 좀 더 인간처럼 보이려고 한다면...”

 

 

“하지만 저놈은 인간이 아니다.” 가브리엘은 크롤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아지라파엘의 말을 잘랐고, 대천사의 말에는 혐오로 물들어 있었다. 크롤리의 다리 사이에 있는 가브리엘의 손이 더 위로 미끄러져 올라왔다.

본인의 주제를 절대 잊게 해선 안 되지.”

 

 

크롤리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눈을 감고 눈물을 참았다.

 

 

“제가 그 사실을 잊을 일은 확실히 없습니다.” 아지라파엘이 딱딱거렸다.

“아마 인간들은 눈을 못 보겠지만, 전 볼 수 있고– 가능하면 안 보고 싶군요. 식사 중에 식욕이 떨어지는 건 사양입니다.”



잔인한 말이었으나 크롤리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아지라파엘이 사실 자신의 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젠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아지라파엘은 어떻게든 자주 크롤리의 눈을 조금이라도 보려고 그토록 노력을 해왔으니까. 아지라파엘은 그렇게 말을 해야만 했고, 그렇게라도 해서 가브리엘을 떨쳐내야 했다. 천사는 충격이 될 만한 말을 해야 했다. 대천사는 아지라파엘이 사랑하는 이에게 이런 말을 하리라곤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아지라파엘은 크롤리의 편안함이나 수치심 따위는 – 크롤리의 감정 같은 건 더더욱 –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걸 대천사에게 보여줘야 했다.

 

 

크롤리는 이해할 수 있었다.

 

 

가브리엘이 사라질 수만 있다면, 크롤리는 아지라파엘에게서 나오는 모든 잔인한 말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어찌 됐든 이놈은 제 책임입니다. 제 선택 아닙니까? 그를 내버려둬요.”

 

 

크롤리는 속으로 움츠렸다. 공포가 엄습해 왔고, 입이 마르고, 심장이 뛰었다.

 

 

안 돼, 그러지 마, 뭘 하라고 하지 마. 명령하듯 말하면 안 돼. 가브리엘이 싫어할 거야, 화 낼 거라고...

 

 

“좋아.” 가브리엘이 한숨을 쉬었다.

“자네 맘대로 하도록.” 대천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나서 대천사는 조금 더 가까이 몸을 기울여 잠시 크롤리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식탁보 밑에서 더욱 심하게 악마를 더듬었다. 가브리엘의 손이 자신의 다리 사이를 세게 움켜쥐기까지 했음에도, 크롤리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가만히 있으려고, 무표정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마침내 가브리엘이 크롤리의 무릎에서 손을 치웠다. 가브리엘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선글라스를 집어 들더니 크롤리의 얼굴에 조심스럽게 씌워 주며 필요이상으로 몸을 기울였다.

 

 

가브리엘은 아지라파엘이 듣지 못하도록 조용하고 은밀하게 속삭였다.

 

 

“네 날개가 그립구나, 아가...”

 

 

그걸로 끝이었다. 크롤리의 전신에 전율이 흘렀다 –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여분의 의자와 가브리엘이 사라졌고 – 그리고 크롤리는 평정심을 잃어버렸다. 그는 급하게 숨을 몰아쉬며 한손에 얼굴을 묻고 흐느낌을 애써 억눌렀다. 자신의 다른 한손을 향해 아지라파엘이 손을 뻗자 크롤리는 움찔했으나, 곧 천사가 손을 잡게 내버려뒀다.

 

 

“뭐라고 했어?” 아지라파엘은 방금 가브리엘이 있었던 곳을 노려보며 물었고, 목소리엔 보호가 담긴 분노심이 가득 차 있었다.

 

 

크롤리는 말도 못한 채 그저 고개를 저으며 숨을 쉬려고 애를 썼다. 아지라파엘이 의자를 가까이 당겨와 크롤리의 바로 옆에 앉았다. 천사는 팔을 둘러 친구를 감쌌다.

 

 

“안 돼,” 크롤리가 헐떡이며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들어 아지라파엘을 바라볼 수조차 없었다. “여기-여기선 안 돼...”

 

 

아지라파엘은 잠시 조용했고, 그 후 크롤리는 천사의 말소리를 들었다. 자신을 향한 말은 아니었지만.

 

 

“저희 디저트 주문을 취소해야겠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천사는 무례하기 직전인 수준으로 무뚝뚝하게 말했다. “계산서만 주세요.”

 

 

몇 분 후 둘은 벤틀리 안에 있었다. 크롤리는 아지라파엘이 든든한 팔로 부축해주지 않았다면 자신은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거라 생각했다. 차문이 닫히자마자 크롤리는 운전대에 머리를 기대고 거칠게 숨을 쉬었다. 생각조차 거의 할 수 없었다. 들리는 거라곤 귀에 쿵쾅거리는 자신의 맥박소리 뿐이었다. 느껴지는 거라곤 자신을 다시 만지던 가브리엘의 손길뿐이었다. 가브리엘이 크롤리의 주인인 마냥, 크롤리는 가브리엘이 원할 때마다 갖고 놀 수 있는 소유물인 마냥.

 

 

그는 네 주인이야. 너는 그의 소유물이고.

 

 

“서두를 필요 없어, 얘야...”

먼 곳에서 들려오는 아지라파엘의 목소리는 물속에서 들려오듯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천사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크롤리의 허벅지에 얹었다.

 

 

크롤리의 속이 뒤집혔고, 그는 간신히 차문을 열어 길바닥에 토할 수 있었다.

 

 

아지라파엘은 친구의 등을 문질러 진정시켜주며 안타까워했다. 크롤리는 겨우 숨을 고른 후 다시 차문을 닫았고, 시트 머리받침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미안해, 천사야.” 크롤리가 겨우 내뱉었다. 

“미안...”

 

 

“아니야, 얘야, 내가 미안해.”

아지라파엘이 한숨을 쉬었다.

“널 이런 식으로 가브리엘과 마주치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집에 있을 걸 그랬나봐.”

 

 

“영원히 집에 있을 순 없어.” 크롤리가 낙담하며 지적했다.

“영원히 숨을 수도 없지. 숨을 방법 따윈 없는 거야. 서점에도 들렀다며.”

 

 

“그가 뭐라고 했어, 크롤리?” 아지라파엘이 다시 물었고 크롤리는 천사의 조심스럽고 주의 깊은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크롤리는 창문 밖을 내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마-말하기 싫어...”

 

 

“그래.” 아지라파엘이 가볍게 수긍하며 크롤리의 떨리는 손을 잡았다.

“괜찮아, 크롤리. 그는 갔잖아. 넌 안전해...”

 

 

크롤리는 눈물을 참으며 쓴웃음이 터지려는 걸 억눌렀다.

 

 

“내가 아까 말했던 거 미안해, darling. 다 거짓말이었던 거 알아줬음 해서. 그가 얼른 가버리길 원했던 거뿐이야. 너도 알지, 그치? 난 네가 눈을 숨기기도 바란 적 없어 – 그 모습을 부끄러워 한 적은 절대로 없어. 네 눈은 아름다워, 사랑하는 크롤리. 너는 아름답다고.

 

 

크롤리는 아지라파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채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가브리엘의 비위를 맞춰야 했던 천사의 거짓 모욕은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크롤리를 훨씬 더 힘들게 하는 건 다리 사이를 더듬던, 아직도 실제처럼 느껴지는 가브리엘의 손이었고... 그를 짓누르고, 그의 몸과 날개를 찢어발기던 잔인한 손길들의 기억이었다.



크롤리는 여전히 순수하게 놓여있는 아지라파엘의 손을 내려다봤다. 다시 메스꺼움이 몰려오는 걸 삼켜야 했다. 그곳에 있던 가브리엘의 손을 여전히 느낄 수 있었다... 대천사의 구역질나는 손길이 여전히 느껴졌다. 그리고 지금 아지라파엘이 같은 곳을 만지고 있었다. 다른 상황이고, 느낌조차도 달랐으나... 너무나 똑같이 느껴졌다. 크롤리는 아지라파엘의 손길로 가브리엘의 손길을 떠올리고 싶지만은 않았다.

 

 

“꼭 말해줄 게 있어, 크롤리.” 아지라파엘이 진심을 담아 부드럽게 말했다.

“오늘밤 그가 네 선글라스를 벗겼을 때, 얼마나 그걸 잡아채서 너한테 돌려주고 싶었는지 몰라. 그렇다고...그것만 하고 싶었던 건 아니고.” 

천사는 약간 눈치를 보며 헛기침을 했다.

“아무튼... 그 선글라스가 너한테 어떤 의미인지 이제 알 것 같아. 그런 짓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였어. 근데 나마저도 몇 번이나 같은 짓을 해왔다니.”

 

 

아지라파엘은 손을 뻗어 크롤리의 얼굴을 자기 쪽으로 돌렸지만 조심스럽게 선글라스는 건드리지 않았다. 크롤리는 마지못해하며 어두운 렌즈 뒤에서 천사를 올려다봤으나, 아지라파엘이 조심스럽고도 정중한 표정으로 살짝 시선을 피한 모습을 보곤 놀랐다. 천사는 크롤리가 자신을 보길 원했으나, 자기자신은 크롤리를 마주보지 않고 있었다.

 

 

“너한테 말해주고 싶어. 맹세할게, 얘야... 다신 그런 일 없을 거야, 절대로.”

 

 

크롤리는 엄청난 안도감이 밀려오는 걸 느꼈다. 두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뺨에 놓인 아지라파엘의 손은 경건함이 느껴질 정도로 부드러웠다. 강요도 없었고, 우악스럽지도 않았다 – 천사의 손길은 인내심과 배려를 맹세하고 있었다.

 

 

대천사의 손길과는 다르게도.

 

 

크롤리는 선글라스를 벗었고, 아지라파엘은 선글라스가 크롤리의 손에 들린 모습에 약간 놀라며 시선을 들어 크롤리의 눈을 마주보았다. 천사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고마워.” 크롤리는 앉은 채 몸을 돌리더니 아지라파엘 쪽으로 다가가며 속삭였고, 아지라파엘은 양팔로 크롤리를 꼭 안아줬다.

“고마워, 천사야.”

 

 

천사의 부드럽고 따뜻한 팔은 그를 잡지도, 비틀지도, 원하는 자세대로 몰아대지도 않았다. 그저 크롤리가 다가오도록 기다려줬을 뿐이었다. 강하지만 부드럽게, 소유하기 위함이 아닌 지켜주기 위해 크롤리를 감싸주었다. 얼굴에 닿은 아지라파엘의 입술은 강제적이거나 탐욕적인 대신, 부드럽고도 순결했다.

 

 

대천사와는 전혀 달랐다.

 

 

둘은 최대한 오랫동안, 어둠 속에서 아무 말 없이 그저 계속 그렇게 있었다. 마침내 크롤리의 마구 뛰는 심장은 정상으로 돌아왔고, 그는 집까지 운전할 수 있을 만큼 침착함을 되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슴속에 자리 잡은 불안한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 차갑고 소름끼치는 공포가 느껴졌고 생각이 끊임없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집에 도착했을 때 대천사가 있을 수도 있잖아.

 

 

그는 어디든, 언제든 나타날 수 있어.

 

 

크롤리는 힘들게 목을 삼키며 잠깐 눈을 감았다. 감은 눈 뒤로 느긋하면서도 포식자 같은 미소가 떠오르자 온몸이 떨렸다.

 

 

네놈은 절대로...영원히...내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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