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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session 13

아지크롤아지 가브크롤

trigger warning : 가브크롤 강제적인 성관계 묘사가 있습니다




크롤리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눈을 빼앗은 건 잔인하고 가학적이지만 천재적이었다.

  

  

심지어 지옥에서도 어느 누가 이처럼 효과적인 방법을 생각할 수 있을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다음 공격이 어디서 어떻게 올지 예측도 못하면서 – 자신이 혼자인지, 바로 다음 순간 혼자가 아닌지 알지도 못하면서 – 자신의 고문자가 바로 뒤나 옆에서, 말 그대로 공기 중에서 갑자기 나타날 수도 있는 상황들 속에서 무서워하지 않는 척하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계속 반항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상대방의 얼굴조차도 볼 수 없고, 어떤 잔인한 보복행위를 당할지 알 수도 없으면서 포획자의 얼굴에 대고 재치 있는 모욕을 내뱉기도 불가능했다. 

  

  

그리고 가브리엘은 그를 놀라게 하는 걸 무척이나 좋아했다.

  

  

대천사는 문을 통해서가 아니라 크롤리의 바로 뒤에 나타나는 쪽을 더 선호했는데, 크롤리를 건드릴 때까지 인기척도 내지 않았다. 그는 지난 만남에서 생긴 상처들 중 특히 쓰리고 고통스러운 부위를 만지곤 했다. 처음에 크롤리는 본능적으로 대천사의 손을 쳐내고 재빨리 거리를 두려고 했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빠르게 배울 수 있었다.

  

  

한번은 그가 가브리엘을 아주 약간 다치게 한 적도 있었다 – 대천사의 복부를 향해 조준도 제대로 못한 주먹을 휘두른 거였다 – 그 다음은 가브리엘이 약속한 대로였다. 칼라가 불타오르며 숨을 앗아가고 무릎을 꿇렸다.

  

  

그 후 가브리엘은 그의 손목을 부러뜨렸고 그날 만남 내내 크롤리는 고통 속에 있어야 했다. 그리고 대천사가 다시 감방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 상태로 길고도 괴로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물론, 대천사는 돌아온 후 크롤리를 치료해줬다. 대천사는 전날 만남에 생긴 상처를 매번 치료해준 후에야 다시 모든 것을 시작했다. 

  

  

가브리엘은 새로운 상태에서 다시 시작하길 좋아했다.

  

  

항상 똑같은 나날이었다 – 채찍자국, 멍, 부러진 곳이 모두 치유된 후 고통이 없는 잠깐의 소중한 순간들이 있었고 그 후엔 질문이 쏟아졌다. 크롤리는 가브리엘이 만족할 대답을 결코, 절대로 해줄 수 없었다. 매번 헛된 만남을 가질 때마다 가브리엘의 분노와 좌절은 점점 커져만 갔다. 크롤리는 대천사의 발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몸서리를 쳤고, 매번 갈수록 쉽게 눈물 흘리며 애원하는 자기 자신을 원망했다. 

  

  

가브리엘은 크롤리의 반항심과, 자존감과, 존엄성을 서서히 빼앗아갔다. 

  

  

가브리엘은 그 모든 것들을 가져갈 수 있었다. 그가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은 아지라파엘이었다. 

  

  

매번 똑같은 나날이 이어졌다. 

  

  

더 이상 그렇지 않을 때까지.

  

  

크롤리는 감방 벽에 기대선 채로 정신이 들었다가 잃었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가브리엘은 한동안 칼라를 02 단계 이상으로 맞춰놓지 않았다. 그가 가한 상처는 칼라의 처벌보다 훨씬 더 괴로웠으니까. 전신이 타오르는 것처럼 느껴진 탓에 진짜 잠을 자기는 불가능했으나, 혈액 손실과 끊임없는 고통으로 인한 피로는 눈을 감기게 하고 몸을 늘어지게 만들었다. 

  

  

그는 가브리엘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갑자기 굳센 양손이 크롤리의 엉덩이에 닿았다 – 친밀하고도 침해적인 손길이었다. 심장이 내려앉았고 그는 본능적으로 손을 밀어내려 했다. 가브리엘은 악마의 양팔을 잡고 머리 위로 들어올려 벽에 세게 밀어붙였고, 대천사의 손이 강하게 손목을 그러쥐더니 크롤리가 목쉰 소리로 애원하며 흐느낄 때까지 비틀었다. 

  

  

“다시 그러지 않는 편이 좋을 거다.” 가브리엘이 으르렁거렸고, 귀에 닿는 대천사의 숨결은 뜨겁고 거칠었다. 

  

  

크롤리는 그러지 않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고, 가브리엘이 갑자기 손목을 놓아주자 헐떡이며 숨을 내쉬었다. 가브리엘이 치유해 주는 손길의 열기가 지나가는 동안 크롤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저번에 얻었던 상처들이 사라져갔고, 잠깐 동안 그의 몸은 온전했다. 

  

  

그 후 가브리엘은 그를 다시 만지기 시작했다. 대천사의 크고 따뜻한 손이 크롤리의 갈비뼈 아래를 훑더니 엉덩이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크롤리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그는 몸을 피하고 가브리엘을 밀어내고 싶은 충동과 싸워야 했다. 

  

  

“그가 네놈 안에서 뭘 봤을지 궁금하군.”

가브리엘은 낮은 목소리로 생각에 잠겨 말했고, 크롤리는 그 말의 의미를 깨닫고 속이 메스꺼워졌다. 

“네놈 수준으로 본인을 낮출 정도의 가치가...뭐가 있었을까? 물론, 처음부터 그놈 수준도 딱히 대단할 건 없었지만 말이다.” 가브리엘이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이 역겨운 악마의 흉물스러운 눈이 타버린 지금에도...” 한손이 크롤리의 얼굴 옆을 쓸었고, 그는 몹시 놀라 움찔거리며 몸을 피했다.

“...네놈은 여전히 특별할 게 없는데.” 그 순간만큼은 크롤리의 본능적인 반항을 무시해주며 가브리엘은 결론을 내렸다. “가치라곤 전혀 없지. 그가 왜 그랬을까?”

  

  

“그는 아무 짓도 안했어.” 크롤리는 잘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절박하게 주장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런 일은 없었다고 했잖아...”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강한 주먹이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날아와 크롤리를 바닥으로 쓰러뜨렸다. 기어 일어나 무릎을 꿇기도 전에 가브리엘의 손이 목을 쥐어 잡더니, 그를 일으켜 세워 엄청난 힘으로 등을 벽에 내동댕이쳤다. 즉시 대천사는 크롤리의 면전에 다가와 낮고 위협적으로 내뱉었다. 

  

  

“다시 재갈을 물려야 하나?”

  

  

안 돼, 제발, 그러지 마...



크롤리는 입술을 깨물며 공포에 질려 애원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이 상황에서 말을 더 할수록 상황은 더 나빠진다는 건 확실했으니까. 가브리엘은 그가 조용히 있길 원했다. 적어도 그것만큼은 크롤리가 복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브리엘은 침묵 하나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대천사는 한손으로 크롤리의 목을 잡아 벽에 고정시키며, 다른 한손으로는 그의 몸을 훑었다. 한 손바닥이 크롤리의 헐떡이는 배에 놓여 있다가 천천히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크롤리는 놀라서 본능적으로 한손을 뻗어 가브리엘의 팔에 얹었다. 대천사를 멈추려는 건 아니었다, 이제 그런 행동은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저 이 낯선 접촉에서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일 뿐이었다. 가브리엘의 손은 크롤리의 복부 아래를 떠나지 않았고, 다른 한손으로는 목을 더욱 단단히 졸랐으며, 크롤리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잊고 숨을 쉬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를 썼다. 

  

  

“더러운 손 치워라, 악마.” 가브리엘이 조용하고 차갑게 명령했다. “내가 떼어버리기 전에.” 

  

  

크롤리는 복종했고, 방어와 애원을 동시에 하며 손을 들어올렸다. 자신이 저항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혼란스럽고 무서웠다. 대천사의 손길만으로는 가브리엘의 의도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크롤리는 말을 하려고 마른입을 힘들게 삼켰다. 

  

  

“무-무슨...뭐 하는 거야?” 그가 절망적으로 속삭였다. 

  

  

가브리엘은 그 질문에 악마를 벌하지 않았다. 그는 크롤리의 엉덩이를 한손으로 쓰다듬으며 잔인하게 대답해줬다. 

  

  

“내가 원하는 것.”

  

  

“하지 마,” 크롤리는 자신의 떨리는 목소리를 싫어하면서 다시 빌었다. 

“싫어, 그러지 마...”

  

  

가브리엘의 엄지손가락이 크롤리의 목 아래를 꽉 눌러 숨도 못 쉬고 말도 못하게 했다. 가브리엘이 가까이 다가왔고, 귀에 닿는 대천사의 숨결은 뜨거웠다.

“싫다고 하면 안 되지, 악마 놈아.”

  

  

목에 놓인 가브리엘의 강한 손이 뒤로 미끄러지더니 크롤리를 벽에서 떨어뜨렸고 바닥 한가운데에 억지로 무릎 꿇렸다. 목에 얹힌 힘센 손이 얼굴을 거친 돌에 짓누르고, 대천사의 훨씬 큰 몸이 크롤리를 뒤에서 덮쳤을 때, 대천사의 의도는 더 이상 못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 크롤리가 자신이 틀리길 얼마나 필사적으로 원하던지 간에 말이다.

  

  

“안 돼,” 그는 애원하며 무릎으로 일어서려고, 몸을 빼내려고 온힘을 다했다. 

“제발 그만해... 싫어, 이러지 마...”

  

  

가브리엘은 약한 몸부림과 필사적인 애원에, 크롤리의 옆구리에 잔인한 주먹을 메다꽂으며 응수했고 연이어 빠르게 한 번 더 주먹을 날렸다. 크롤리가 숨을 쉬려고 애를 쓰는 동안 가브리엘은 자신 쪽으로 악마를 끌어올려 귀에 대고 으르렁거렸다. 

“계속 싸워봐라, 크롤리. 어떤 일이 생길지 알게 될 거다.”

  

  

대천사는 악마를 다시 바닥으로 밀어버린 후 천천히 머리를 바닥에 짓눌렀고, 크롤리는 격렬하게 몸을 떨면서도 얌전히 있었다. 공포와 고통과 수치심의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제발,” 그는 절망에 빠져 그 말만을 반복했으나, 자비의 희망은 사라져만 갔다. 

“부탁이야, 하지 마...”

  

  

“어려울 게 뭐 있나?” 가브리엘이 웃었고 크롤리는 지퍼가 내려가는 소리에 몸서리를 쳤다. 

“이런 짓을 수백번은 해봤을 게 뻔한데. 모든 악마들이 창녀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잖나.” 

  

  

다른 악마들이나 역겨운 강간범 천사들이 뭐라고 불리든 – 크롤리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6000년 간 아지라파엘을 사랑해왔다. 비록 아지라파엘도 자신을 사랑할 거라고 감히 믿은 지 14년밖에 안 되긴 했지만 – 그는 다른 누구를 원한 적도 없고, 함께 한 적도 없었다.

  

  

“이런 짓”을 함께 한 건 아지라파엘이 유일했다.

  

  

하지만 그건 – 이런 짓이 아니었다. 지금 이것과는 비슷하지도 않았다.

  

  

부드러운 손길과 맹렬한 눈빛을 가진 아지라파엘... 아지라파엘은 조심스럽고 친절하게 그에게 묻곤 했다. “괜찮아, dear?”, “편안해?”, “마음에 들어?” 아지라파엘은 언제나 크롤리에게, 그가 뭘 필요로 하고 뭘 원하는지, 그가 어떻게 느끼는지에 대해 초점을 맞췄다. 아지라파엘과 함께 했을 때 ‘이 행위’는 친밀하고 아름다웠으며 크롤리는 자신이 소중하고 사랑받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크롤리는 망가지고 있다는 느낌밖엔 들지 않았다.

  

  

가브리엘은 폭력적이고 이기적이었다. 그는 크롤리의 양팔을 등 뒤에 고정시키며 얼굴을 바닥으로 짓눌렀고, 강제로 안으로 쑤셔 넣을 때마다 금이 간 갈비뼈에 고통이 더해졌다. 그는 지옥조차 한번도 하지 않은 방식으로 크롤리를 잔인하게 다루며 강간하고 있었다. 고통과 수치심으로 흐릿한 상태에서, 누군가가 흐느끼고 애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가브리엘이 마침내, 드디어 본인의 것을 빼내고 몸을 떼고 나서야 크롤리는 그 소리가 자신이 낸 것임을 깨달았다. 

  

  

크롤리는 잠사 그대로 누워서 숨을 고르려고 노력했고, 그 후 힘없이 겨우 몸을 일으키고 무릎을 꿇어앉았다. 자신의 피와 가브리엘의 정액이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리자 토할 것 같았다. 가브리엘의 손이 머리에 닿았고 손가락이 머리칼을 스치자 크롤리는 저도 모르게 얼른 몸을 뒤로 뺐다. 

  

  

갑자기 가브리엘이 머리카락을 움켜쥐더니 본인 쪽으로 가까이 당겼다. 겁에 질려 숨도 쉬지 못한 채 크롤리는 굳어서 얌전히 몸을 맡겼다. 가브리엘은 크롤리의 얼굴 쪽으로 몸을 숙이곤 단호하고 무자비한 목소리로 말했다. 

  

  

“결국엔, 네놈도 나랑 싸우는 걸 그만두는 법을 배우게 될 거다.” 

 

  

“죄-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S-sorry, sorry)” 크롤리가 양손을 들어 빌면서 쉭쉭거렸다. 

  

  

가브리엘은 부드럽고도 잔인하게 재밌어하며 웃었다.

“정말이지 하찮은 뱀이로구나.” 그가 놀려댔다. 

“네놈이... 무-무-무서울 때만 이러는 건가?(Just when you get s-s-scared?)”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내 얼굴에 독을 뱉을 때도 이런 식이었지.” 

가브리엘의 엄지손가락이 크롤리의 떨리는 입술을 천천히 어루만졌고, 얼음처럼 차가운 공포가 악마의 척추를 타고 내려갔다. 대천사의 목소리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웠다. 

“또 그 장난질을 치고 싶어지나, 이 야비한 뱀아?” 

  

  

“아-아니요.” 크롤리는 고개를 저으며 속삭였다. 뜨거운 눈물이 화상으로 엉망이 된 눈을 태웠다. 심장이 공포로 미친 듯이 뛰었다. “안 그럴게요, 제발, 죄-죄송해요....”

  

  

크롤리가 닥쳐올 처벌을 기다리는 동안 긴장서린 침묵이 이어졌다...그리고 가브리엘은 마침내 악마를 거칠게 밀쳐 내며 놓아줬고, 그는 다시 주저앉으며 무릎을 꿇었다. 대천사의 목소리에 담긴 복수심 어린 만족감과 혐오는 크롤리를 움찔하게 만들었다. 

  

 

“그래, 나도 안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크롤리의 목 안에서 깊고 아픈 흐느낌이 터져 나와 숨통을 조였고, 그는 거칠게 숨을 쉬며 흐느낌을 억누르려고 온힘을 다했다. 가브리엘의 소유욕 강한 손이 느릿하게 머리칼을 쓸자 몸이 떨렸지만, 피하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눌렀고...대천사의 손길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으나 얌전하게 가만히 있었다. 속이 뒤집히기 직전이었고, 자신이 대천사 위에 토해 버린다면 가브리엘이 어떻게 나올지 생각하자 공포에 질렸다. 그는 심호흡을 하며 움직이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좋아...훨씬 낫군.” 잠시 후 가브리엘이 나직하게 말했다.

“이제 나도 좀 알 것 같구나. 네놈의...매력 말이다. 지금껏 이걸 혼자만 알고 지내다니, 아지라파엘에게 실망이로군.” 

가브리엘이 가까이 다가온 게 느껴지자 크롤리는 긴장했으나, 감히 몸을 피하진 못했다. 

“상관없다.” 가브리엘이 속삭였다. “이제 넌 내 것이니까.”

  

  

크롤리는 그 말에 담긴 어두운 맹세에 몸을 떨었다. 가브리엘이 몸을 일으켰고 발소리가 천천히 멀어지더니 뒤에서 감방 문이 닫혔음에도 그는 계속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크롤리는 고개를 들었으나 그 자리에 그대로 무릎을 꿇어앉아서, 충격으로 떨리는 몸을 양팔로 감싸곤 숨을 진정시키려고 애를 썼다.

  

  

갑자기 마법처럼 가브리엘이 돌아와 크롤리의 목을 잡더니 자신의 실크로 된 양복에 닿을 때까지 그를 뒤로 끌어당겼고, 크롤리는 이제 그 양복은 다시 못 입을 정도로 더러워졌을 거라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한 가지 더, 잊어버릴 뻔했군.” 가브리엘은 부드럽게, 거의 친근하게 말했다.

“누구한테든...이 일에 대해 입이라도 벙긋한다면...” 대천사는 한손으로 크롤리의 멍든 배를 쓸었고, 다른 한손으론 그의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여 목을 드러나게 했다. 대천사는 자신의 입술이 악마의 귀에 닿을 때까지 매우 가까이 다가와 잔인한 맹세를 속삭였다.

“네놈의 눈을 돌려주마. 그동안만 구경시켜 주지. 아지라파엘을 산채로 태워 죽이는 모습을 말이다.” 

  

  

그 끔찍한 위협은 크롤리가 마지막까지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던 것들을 짓밟아 버렸다. 크롤리는 자신이 침묵만 지킨다면 가브리엘이 그럴 수 없다는 사실도, 아지라파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자신은 아무렇지 않은 척 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어버렸다. 크롤리는 타 죽는 게 어떤 건지 알고 있었다. 자신때문에 천사가 불타오르며 고통에 잠겨 죽어가는 모습 외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제발 그러지 마요,” 크롤리가 흐느꼈다. 

“그를, 그를 해치지 마세요... 뭐든지 할게요. 원하시는 거라면 뭐든지 할게요, 제발요...” 

  

가브리엘은 악마의 목에 대고 낮고도 어둡게 웃었다. 

“그래, 그럴 거다, 아가야(sweetheart).”

그가 속삭였다. “네놈은 그렇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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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러긴 했지만... 아지라파엘에겐 모든 것이 조금은 너무 빨랐다. 

  

  

크롤리는 열정적으로 천사를 침실로 밀어 넣었고, 아지라파엘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는 입을 아지라파엘의 입에서 떼지 않으며 손으로는...모든 곳을 더듬고 있었다. 이런 적이 처음은, 평생 처음은 아니었으며, 아지라파엘은 자신의 마음속에 쌓여가는 욕망의 뜨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크롤리가 사라진 이후로 정말 오랫동안, 간절하게 이 순간을 열망해 왔다. 어떻게 보면, 이 일은 옳고도 완벽하게 느껴졌고 너무 오랫동안 기다려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건 끔찍하게 잘못된 일처럼 느껴졌다. 

  

  

불과 몇 분전만 해도 크롤리는 아지라파엘의 부엌 바닥에서 완전히 무너져있지 않았던가.

  

  

아지라파엘은 숨도 못 쉬다가 크롤리의 키스에서 간신히 빠져나와 약하게 저항할 수 있었다.

"이건 좀...갑작스러운데. 얘야, 괜찮은 거 맞아...?"

 

  

크롤리가 침대로 밀어 넣은 탓에 말은 잠시 끊겨버렸고, 천사는 힘들게 일어나 앉았다. 크롤리는 잠시 동안 앞에 서 있더니 천천히 선글라스를 벗어 침실용 탁자에 두고, 크게 뜬 눈에 애원을 담아 아지라파엘의 눈을 바라봤다. 

  

  

“날 원하지 않아?”

  

  

글쎄, 그냥 속임수가 아닐까?

  

  

“당연히 원하지.” 아지라파엘은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도 알잖아.”

  

  

크롤리는 더 이상 용기를 낼 필요가 없었다. 그는 얼른 아지라파엘의 재킷, 조끼, 셔츠를 벗기고 등이 향하도록 침대에 눕혔다. 다리를 벌리고 천사 위에 걸터앉은 후 몸을 숙여 키스를 했다. 놀랍도록 적극적인 크롤리를 보는 건 흥분되면서도 유혹적이었다. 그리고 이건 좋은 신호여야 했다, 안 그런가? 겁먹고 트라우마에 빠진 자신의 악마가 이렇게 나올 수 있을 만큼 안전함을 느끼고 강하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크롤리는 그렇지 않잖아? 

  

  

불과 몇 분전에 크롤리가 겁에 질려 떨면서 울던 모습에 아지라파엘의 걱정이 다시 되살아났다. 본인을 방어하기 위해 고작 손을 들어 올린 걸로 사과하면서 빌던 모습이 떠올랐다. 

  

  

게다가 크롤리는 아직 본인 옷은 벗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머뭇거리며, 무엇보다도 조심스럽게, 아지라파엘은 한손을 들어 크롤리의 소맷자락을 쓸며 손가락으로 단추를 만지작거렸다. 악마는 얼른 천사의 손목을 잡아 침대로 눌러 꼼짝 못하게 하더니 중얼거렸다. “잠깐만, 아직...” 그리고 몸을 숙여 아지라파엘에게 다시 키스를 했다. 

  

  

아지라파엘의 걱정은 어느 때보다도 커져만 갔다.

  

  

“진정해, 얘야.” 그는 손을 뻗어 크롤리의 얼굴을 만지며, 부드럽게 친구를 약간 뒤로 밀어내어 키스를 중단시켰다. 

  

  

“안 그래도 돼, 나 괜찮아.” 크롤리는 숨도 안 쉬고 주장했다. 

“괜찮아, 괜찮다니까...”

  

  

아지라파엘은 크롤리가 ‘괜찮기를’ 바라지 않았다. 크롤리가 원하기를 바랐다 – 열정적이면서도 간절하게, 자신과 함께 천천히 즐길 수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지금 크롤리에게서 느끼고 있는 감정은 그렇지 않았다 – 공포와, 미친듯한 필사적임 뿐이었다. 

  

  

“크롤리...크롤리, darling....” 아지라파엘은 부드럽게 반박했다.

  

  

“할 수 있어.” 크롤리가 중얼거렸고, 그 말은 예상하던 말들 중 가장 불안한 한마디였다. 아지라파엘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괜찮아, 괜찮다고...”

  

  

그는 손목을 놓아주더니 침대로 미끄러지듯 누워 한손은 아지라파엘의 엉덩이에 대고, 다른 한손은 천사의 바지 지퍼를 향했다. 이 지경에 오자 아지라파엘의 모든 본능이 이건 잘못됐다고, 지금 일어나선 안 될 일이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아지라파엘은 크롤리가 주고자 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이런 방식으로는 아니었다. 천사는 친구를 안아주고 싶었고, 사랑받고 소중히 여겨지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상기시켜주며 천천히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크롤리가 일종의 왜곡된...의무감이나, 혹은 부채감을 느끼면서 아직 준비도 못한 상태에서 본인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것은 원치 않았다. 

  

  

“크롤리...기다려, 얘야, 그만...”

  

  

크롤리의 손이 아지라파엘의 바지 앞섬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을 때, 아지라파엘은 그의 손목을 잡고 가까이 끌어당겼다. 크롤리는 기꺼이 끌려와 눈을 크게 뜨고 천사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아내려고 아지라파엘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아지라파엘은 재빨리 서로의 위아래를 바꿔, 단단하지만 부드럽게 크롤리의 양 손목을 꼼짝 못하게 잡아 침대로 내리눌렀고, 크롤리는 놀라면서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아지라파엘을 향해 씩 웃더니 천사의 손아귀에서 정말 벗어나지는 않는 한에서 장난스럽게 손목을 비틀었다. 

  

  

“네가 원하는 게 이런 거구나, 그치?” 크롤리가 놀렸으나, 말은 너무 빨랐고 절박함이 묻어나왔다. 그의 눈은 공포와 고통으로 빛나고 있었다. 

“좋아, 괜찮아. 그거야, 천사야. 계속해, 날 가져줘(take me)...”

  

  

그만해, 크롤리!” 오싹해지며 겁이 난 아지라파엘이 말을 잘랐다. 크롤리의 손목을 쥔 손에 약간 더 힘을 주고, 친구를 멈출 수 있을 정도로만 한번 흔들었다.

  

  

크롤리는 움찔하며 움직임을 완전히 멈추고 잠깐 눈을 꼭 감더니, 무서워하며 아지라파엘을 힐끗 올려다봤다. 아지라파엘은 평생 존재해온 기간 동안 이처럼 낙담과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천사는 얼른 잡았던 손에 힘을 빼고 살짝 들어 올려 크롤리를 제대로 바라보았다 – 이제 그는 선글라스라는 유혹적인 작은 속임수 없이도 눈을 전혀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너-너라면 괜찮아.” 악마가 숨도 쉬지 않고 속삭였고, 지금은 조금 더 차분해진 목소리였다 – 하지만 그 모습은 이 모든 걸 더 화나게 만들 뿐이었다. 

“넌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 천사야. 네가 원하는 거면 난 뭐든지 할 수 있어...”

  

  

“내가 원하는 건 이걸 그만두고 나한테 얘기하는 거야.” 아지라파엘이 부드럽게 말했다.

“크롤리, my dear...어디서 이런 생각이 나온 거며, 왜 지금 이러는 거야? 뭘 해내고 싶어서?”

크롤리는 아무 대답이 없었고, 아지라파엘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명령했다. “나 좀 보렴.”



크롤리는 얼른 복종했다. 그의 눈은 눈물로 가득 차 있었고, 적나라하고 솔직한 그의 말에는 절박함이 있었다.

  

  

“그냥 널 행복하게 해 주고 싶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지라파엘은 크롤리를 너무나 사랑한 까닭에 마음이 아팠다. 크롤리가 느끼는 상처 때문에 괴로웠고, 크롤리가 이해할 수 있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넌 이미 그러고 있는걸.” 천사는 강하게 주장하며 친구를 안심시켰다. 

“얘야, 넌 지금도 날 행복하게 해주고 있어!”

  

  

크롤리의 표정은 괴로움에 가득 차 있었고 불안해보였다. 그가 한쪽 손목을 빼내려고 하자 아지라파엘은 손을 놔줬다. 크롤리는 떨리는 손을 들어 천사의 얼굴을 만졌다. 

  

  

“내가 널 해치려고 했어.” 크롤리가 말했다. 

“널 하마터면 때릴 뻔 했잖아. 그리고...부정도 하고...” 

갑자기 그는 자신의 셔츠를 내려다보더니, 자유로운 손을 아래로 뻗어 단추를 만지작거렸다. 

“자, 원한다면 옷도 벗을게. 네가 해도...”

  

  

싫어.” 아지라파엘은 한손으로 친구의 떨고 있는 손을 잡아 둘 사이에 오게 했다. 나머지 한쪽 팔로는 크롤리가 움직이거나 다른 뭔가를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세게 감싸 안았다.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나도 원하지 않아. 그리고 네가 원하지 않는다는 거 알아!”

좌절과 혼란으로 가득 찬 아지라파엘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냥 나한테 얘기를 해주면 좋겠어, 크롤리. 난 모르는 게 너무 많아. 그놈들이 널 다치게 하고 겁을 준 건 알아. 네가 어둠 속에서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나한테 이 많은 일들을 숨기고 있는 것도 알아. 네가 원한다면 말 안 해도 괜찮아. 다만 널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알고 싶어...  이러는지도...”

  

  

“그가 내 눈을 빼앗았어.”

  

  

크롤리의 필사적이고 거친 속삭임에 아지라파엘의 절망감이 폭발하듯 치솟았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오래된 기억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지라파엘의 품속이라는 부드러운 구속 아래에서, 그는 움직이지도 저항하지도 않으며 몸을 떨었다. 

  

  

“뭐?” 아지라파엘은 공포에 질려 부인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 눈은 멀쩡하잖아...”

  

  

“성수로 태워버렸어...” 크롤리는 조용하게, 조심스럽고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그가...그가 나중에 치료해 주긴 했지만, 인간의 시력만 돌아온 거 같아. 아마...성수가 내...내 원래의 눈에 영원히 상처를 남겼나봐, 다만...” 그는 고개를 저으며 눈을 깜빡여 눈물을 털어냈다.

  

  

“하지만...여전히 네 눈들은...” 

  

  

크롤리는 몸을 주춤거리며 눈을 감았고, 그가 느끼는 엄청난 수치심이 아지라파엘에게도 뜨겁게 밀려왔다. 천사는 자신이 말을 끝맺지 못했음을 몹시 후회하며 크롤리가 멋대로 결론짓기 전에 얼른 말을 마치려고 입을 열었다.



정말로 놀랄 만큼 멋지고, 아름다워. 네 눈은 아름다워. 너도 아름다워, 사랑하는 크롤리...

 


하지만 크롤리가 더 빨랐다. 그의 말은 떨리고 있었고 점점 심하게 더듬거렸다.

“그는 눈을...똑-똑같이 만들어줬어...그-그래서 내가...내 주제를 영원히 잊을 수 없게. 절대 잊지 말라고, 또...또 다신 눈을 마주보지 말라고 그랬어... 그러면 안 된다고, 그-그럴 권리 따윈 없다고...” 

  

  

아지라파엘은 갈수록 익숙해지는 뜨거운 떨림이 명치에서부터 느껴졌다. 가브리엘이 한 짓을 깨닫자 보호심이 깃든 분노가 솟아올랐다. 크롤리는 떠는가 싶더니 얼른 몸을 작게 웅크렸고, 아지라파엘은 잠깐 눈을 감고 분노를 애써 억눌렀다. 천사는 자신의 악마를 잡고 있던 손의 힘을 풀고, 친구의 팔을 위아래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크롤리, 그건 사실이 아니야. 너에겐 세상의 모든 권리가 있어. 네 눈을 부끄러워하지도 마. My darling, 네 눈은...”

  

  

“더 이상 어둠 속에서 볼 수가 없어.” 크롤리가 말을 이었고, 아지라파엘의 달갑지 않은 위로를 막기 위해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말은 갈수록 불안정해졌으며 필사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어두워지면, 보이는 거라곤...그가 나한테 한 짓들밖엔 없어, 그가...그 모든 걸 다-다시 할 것만 같아. 그리고...그리고 난 나약하고 쓸모도 없고, 이-이렇게 무-무서워하면 아-안 되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천사야, 난 온몸이 흉터투성이야, 완전히. 너무 징그러워서, 나-난...너한테 보-보여주기가 싫었어, 그래도...” 

크롤리의 손이 천사의 손을 조금 끌어당겼고, 그의 시선은 자신의 셔츠 단추 쪽으로 다시 내려가고 있었다. 

  

  

"그만해."  

  

아지라파엘은 친구의 손을 꼭 잡고, 남은 한손으로 조심스럽게 크롤리의 얼굴을 자신 쪽으로 기울였다. 크롤리의 시선은 몇 번이나 흔들린 후에야 겨우 아지라파엘의 시선을 마주볼 수 있었다. 자신이 기대하고 원했던 것이었기에 크롤리가 그 말에 따랐음을, 아지라파엘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얼마나 자주 날 보라고, 눈을 드러내라고 강요를...아니, 강제로 몰아댄 걸까? 강제로 시킨 거나 다름없지, 안 된다고 말할 수도 없었을 테니까. 허락도 못 받았겠지. 눈이 마주친 대가로 벌을 받고, 눈이 멀어 버리고... 그 와중에 나는 툭하면 눈을 보라고 그러고.

  

  

맙소사, 그가 끔찍하게 무서워한 건 당연하잖아. 

  

  

자신이 요구해 오던 끔찍한 진실을 알게 되자 천사의 속이 메스꺼워졌다. 진실은 너무나 잔인했기에, 이젠 자신이 진상을 정말 알고 싶었는지 확신조차 들지 않았다. 

  

  

아지라파엘은 자신이 무심코 저질러온 잔인한 실수에 고개를 살짝 저으며, 크롤리의 얼굴에서 손을 떼서 대신 뒤통수에 얹더니 친구가 머리를 기댈 수 있도록 자신의 어깨를 부드럽게 내어주면서, 원한다면 눈을 숨길 수 있다고 격려해줬다. 옳은 선택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크롤리는 감사해하며 그 말에 따랐고, 아지라파엘을 감싸 안으며 품속에 더욱 파고든 것이다.

  

  

“크롤리... 내가 원하는 건 이게 다야. 우리 둘이 같이 있는 거. 그게 전부야.” 

아지라파엘은 부드럽고도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단언했다. 

“다른 건 다 필요 없어. 난 네가 원하는 대로만 했으면 좋겠어.”

대답이 없었으나 아지라파엘은 크롤리가 듣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기에 계속 말을 이었다. 

“난 항상 네 눈이...정말 놀랍다고 생각했어, 얘야. 영원히 그럴 거고. 네가 가진 흉터들로 내가 널 얼마나 아름답게 생각하는지 바꿀 수는 없어. 상처를 부끄러워해야 할 쪽은 상처를 입힌 놈들뿐이야.”

  

  

크롤리는 약간 몸을 떨었고, 아지라파엘은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며, 자기도 모르게 자꾸만 밀려오는 어두운 복수심으로 찬 생각들이 아닌, 품에 안겨있는 자신의 연약한 악마에게 초점을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나한테 보여주고 싶다면...보고 싶어.” 아지라파엘은 계속해서 말했다. 크롤리가 약간 긴장하자 천사는 빠르게,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흉터들을 숨겨야 한다면... 네게 필요한 대로 했으면 해. 네가 조금이라도 불편한건 원하지 않아, darling. 네가...네가 나한테 보여주고 싶어질 때까지, 억지로 보여주지 않았으면 좋겠어.” 

  

  

둘은 정말 가까이 붙어있었고 주위는 너무나도 고요했다. 아지라파엘은 자신의 맨가슴에 닿은 크롤리의 심장이 쿵쾅대며 뛰는 것을, 공포에 차서 떨리는 숨결의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안겨있던 크롤리가 차차 진정하기 시작하며 숨소리도 느려지기 시작했다. 크롤리가 다시 손을 빼내려고 하자 아지라파엘은 긴장했지만 – 그는 천사의 목에 팔을 두르고 필사적으로 가까이 끌어당겼을 뿐이었다. 

  

  

“그거야, 내 사랑.” 아지라파엘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 

“괜찮아...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 난 아무데도 안 가. 난 바로 여기에 있고, 넌 아무것도 안 해도 돼. 그냥 나랑 같이 여기 있기만 해줘...”

  

  

크롤리는 그저 격렬하게, 필사적으로 천사를 세게 안고만 있었다. 마침내 그는 고개는 들지 않고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만 얼굴을 들었다. 쉰 목소리가 거칠게 흘러나왔다.

  

  

“널 잃고 싶지 않았어.”

  

  

“안 잃을 거야.” 아지라파엘이 맹세했다.

  

  

크롤리는 망설이더니, 나직하고도 불안하게 말했다. 

“기-기다리지 않아도 돼...”

  

  

아지라파엘은 가슴이 아팠다. 

“널 위해서라면 난 영원히 기다릴 수 있어, 크롤리.” 

슬프게 미소 지으며, 천사는 악마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고 부드럽게 말했다.

“너도 날 기다려줬잖니.”

  

  

“나도 영원히 기다리긴 싫어.” 크롤리는 코를 훌쩍거리며 시인했다. 

“너도 안 그래도 돼. 근데 난 빌어먹을 옷도 못 벗고 있어서...”

  

  

“굳이 안 벗어도 되잖아.” 아지라파엘은 가볍고도 친절하게 지적해줬다.

“아니면 너나 내가, 오, 어디보자... 너한테 안대를 씌우고 관계를 가져도 되지 않을까?”

천사는 조심스럽게 놀림 섞인 제안을 했다. 

  

  

천사는 대답으로 피부에 스치는 부드러운 숨결을 느꼈다. 크롤리가 소리 없이 웃었던 것이다. 곧이어 웃음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여전히 소리 없는 흐느낌 속에 사라져버렸다. 아지라파엘의 미소도 흐려졌고 눈은 눈물로 뜨거웠다. 천사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친구도 느낄 수 있도록 크롤리를 꼭 안아줬고, 이번만큼은 감정을 억누르지 않았다. 마침내 크롤리는 기꺼이 고개를 들어 눈물 어린 금빛 눈으로 아지라파엘의 시선을 마주보았다. 

  

  

“네가 부탁하는 거라면 난 뭐든지 할 거야, 천사야.” 

그는 강렬하고도 필사적으로 중얼거렸다. 너무나 많은 신뢰로 가득 찬 맹세 때문에 아지라파엘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뭐든지.”

  

  

아지라파엘은 친구의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주며 뺨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고, 키스로 눈물을 씻어주었다. 그는 절대 그 맹세를 더럽히지 않겠노라고, 절대 신뢰를 깨지 않겠노라고 속으로 맹세했다. 천사는 크롤리가 주고 싶어 하는 건 무엇이든 받아들일 것이며, 그 이상은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크롤리가 숨어야 할 때가 오면... 그는 아지라파엘의 품속에 숨을 수 있을 것이다.

  

  

“네가 그럴 거란 거 나도 알아, 얘야.” 천사는 중얼거리며 악마를 더 가깝게 끌어안았다. 크롤리는 떨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천사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나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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