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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session 11

가브크롤 아지크롤

비교적 평화로운 나날들이 이어졌고 아지라파엘과 크롤리는 일상에 조금씩 빠져들으나, 아지라파엘의 속마음은 곧 다가올 위험을 떠난 적이 없었다. 크롤리를 집으로 데려온 것은 함정이 틀림없었다... 그 말은, 자신들을 잡길 원하는 가브리엘이 언제라도 들이닥칠 수 있음을 의미했다.

 

 

놀랍게도 거의 일주일이 지났으나... 대천사는 오지 않았다. 아직은.

 

 

여섯째 날 오후, 낮잠에서 깬 크롤리는 선글라스를 끼고 구겨진 파자마를 입은 채 아지라파엘의 침실에서 나왔다. 커피테이블엔 미지근한 코코아가 놓여있었고, 아지라파엘은 소파와 테이블에 쌓인 수많은 책들로 거의 둥지를 틀고 있었다.

 

 

“이게 다 뭐야?” 크롤리의 묻는 목소리는 자고 일어난 탓에 약간 쉬어 있었다. 그는 소파 앞바닥에 자리를 잡았고, 반쯤은 앉고 반쯤은 무릎을 꿇은 자세로 아지라파엘의 다리에 몸을 기댔다.

 

 

“치워줄게, 잠깐만...” 아지라파엘은 소파 위 옆에 쌓인 책더미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크롤리는 천사의 종아리에 한 팔을 감고 가볍게 쓰다듬으며, 천사를 향해 마음 편하게 웃어보였다.

“괜찮아, 진짜로. 그냥...뭐 하고 있었어?”

 

 

아지라파엘은 약간 얼굴을 찡그렸다. 크롤리가 집에 온 첫째 날, 그는 소파를 만질 엄두도 내지 못했었다. 크롤리가 이런 모습으로 자신의 발밑에 앉아있다는 생각에 마음속이 다시 분노로 들끓기 시작했다. 이 모습은, 전에는 화날 일이 아니었다. 크롤리가 늘 해왔던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 그는 편안하다며 자신의 몸으로 천사를 둘둘 감곤 했으니까.

 

 

“나 괜찮아, 천사야.” 크롤리가 강하게 주장했고, 아지라파엘은 선글라스 뒤에서 악마가 눈을 굴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여기가 좋아.” 크롤리는 발로 바닥을 쓸면서 소파 옆을 꾹 밀었다. “따뜻하고,” 그는 아지라파엘의 무릎에 입을 맞추며 더 가까이 다가오더니,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부드러워.”

 

 

따뜻한 애정이 가득 차올랐고, 아지라파엘은 한손을 내려 크롤리의 머리카락을 쓸어줬다. 크롤리는 눈을 감고, 행복에 젖은 작은 콧소리를 내며 아지라파엘의 무릎에 머리를 기댔다. 얼마 후, 그는 궁금했던 게 다시 기억이 났고, 머리를 들지 않고 다시 물었다.

 “뭐하고 있었어?”

 

 

“어, 생각 중이었어.” 아지라파엘은 설명을 하면서도, 크롤리의 기분을 망치는 이야기를 꺼낸 걸 후회하고 있었다. 그는 안심시키려는 듯 계속해서 크롤리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준비해야지. 가브리엘은 결국 언젠간 올 거야. 어떤... 경고알림 같은 게 필요해.”

 

 

대천사의 이름이 나오자 크롤리의 어깨가 긴장으로 약간 굳었고,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하지만 그가 말을 시작했을 때, 악마의 목소리는 생각에 잠겨 있었고 차분했다.

“의심을 받을 지도 몰라. 안 그래?”

 

 

“가브리엘이 알아챈다면 그렇겠지.” 아지라파엘이 지적했다. “내가 기적을 쓴다면.”

 

 

크롤리는 천사의 부드러운 손가락이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을 만큼만 고개를 들어 아지라파엘을 쳐다봤다. “어떡하려고?”

 

 

아지라파엘은 자신의 얼굴이 약간 달아오름을 느꼈고, 얼굴을 찡그리며 말을 덧붙였다.

“인간들의 마법 같은? 뭐 그런...자연스러운 방식으로.”

 

 

크롤리는 부드럽게 과장된 한숨을 쉬었다. “마법을 거는 천사라. 세상이 어떻게 되가는 거야?” 그는 생각에 빠졌고, 미소는 조금 사라졌다.

“위험해? 너희 쪽도 금지하는 행위지, 맞지?”

 

 

“그들이 알아챈다면 못하게 하겠지.” 아지라파엘이 동의했다.

“하지만 천상의 기적을 알아채듯 마법을 알아챌 순 없어. 가브리엘도 모를게 뻔해. 이건... 그가 오고 있으면 미리 약간의 경고를 해 주는 거야. 우리가 대비할 수 있도록.”

 

 

크롤리는 몸을 약간 더 바로 세우고 가까이 다가가, 소파를 등 뒤에 기대고 몸을 돌려 아지라파엘의 허벅지 위에 뒤통수를 얹었다. 이렇게 기댄 자세에서 아지라파엘은 크롤리의 표정을 대부분 정확히 볼 수 있었다. 선글라스 뒤에 가려진 그의 눈은 불안으로 차 있었다. 천사의 마음 한구석에서 크롤리도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지라파엘은 눈길을 돌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크롤리는 천천히 목을 삼켰고, 놀라울 정도로 침착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꺼냈다.

“얼마나 미리 경고가 오는데?”

 

 

“1분 정도.” 아지라파엘은 무릎에 놓여 있던 책을 치우고 크롤리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친구를 안심시키고 싶었다. “아마 더 짧을 수도 있지만.”

 

 

잠시 후, 크롤리는 자신의 얼굴 쪽을 대강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멍자국이 더 있어야 되지 않아?”

 

 

아지라파엘은 당황스러움에 얼굴을 찌푸렸다.

“네 멍들은 정말 잘 낫고 있어.” 그는 상처들을 살펴보며 말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도 더 빨리 낫고 있네. 우리가 생각한 것만큼 칼라가 회복을 방해하진 않는가봐...”

 

 

“아니.” 크롤리는 일어나 앉아서, 기대고 있던 걸 멈추고 몸을 돌려 아지라파엘을 마주봤다. 슬프게도, 그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아지라파엘의 손에서 멀어졌다.

“내 말은, 멍이 더 있어야 한다는 거였어. 가브리엘이 온다면.”

 

 

아지라파엘은 눈을 깜빡였다. 크롤리의 뜻을 이해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는 이 제안이 너무나도 싫었기 때문이리라.

 

 

“그는 네가 날 처벌하기를 기대하고 있잖아.”

크롤리는 한숨을 쉬며 아지라파엘을 상기시켰다.

“뭐, 정확히 말하면 기대하는 건 아니지.”

악마는 말을 고쳤다. “오히려 정확히 그 반대를 기대하겠지. 네가 그러지 못하리란 걸 거의 확신하고 있으니까 – 계획대로 되는 거야. 그는 널 그렇게 잡으려 들 거고.”

크롤리는 잠깐 말을 멈췄다. “그러니까 내가 말한 대로 해야 돼.”

 

 

“싫어.” 아지라파엘은 다시 책을 내려다보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널 아프게 할 순 없어, 크롤리.”

 

 

“누가 아프다고 그래?” 크롤리의 어조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거짓된 가벼움을 띠고 있었다. 그는 부인하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고작 멍이 몇 개 드는 거야 – 그가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만 한두 개로...”

 

 

“안 해.”

 

 

“말 좀 들어, 천사야. 내가 널...” 크롤리는 하고 싶은 말을 찾는 듯 허공에 손짓을 했다. “...널 엄청 짜증나게 한다고 상상해봐. 아님...내가 너한테 건방지게 욕을 퍼붓는다고 상상하거나. 그럼...” 그는 한쪽 손으로 다른 쪽 손을 강하고 날카롭게 내려치는 동작을 취했다.

 

 

“그만해.” 아지라파엘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크롤리가 자신의 어조에 약간 움찔하며, 꾸며낸 장난스러움이 사라지는 모습에, 천사는 괴로움 속에서도 죄책감이 솟아올랐다.

“그냥...그러지 마, 크롤리. 안 해. 못해.”

 

 

“네가 아니면 그가 직접 할 텐데?” 조금 끊기듯 나온 목소리에는 모든 장난스러움이 사라져 있었다. 선글라스에 가려져 있긴 했지만, 아지라파엘은 크롤리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우리를 잡는다면 그렇게 될 테니까. 넌 명령을 받았는데, 시행을 안 한 거잖아. 그는 널 잡아가서 처벌할 거야. 그리고 나도 잡아가겠지...” 크롤리의 목소리는 잠깐 이어지지 않았다. 조금 후에 그는 단호하게 끝을 맺었다. “그는 날 잡아가겠지. 그걸 원하는 거야?”

 

 

“당연히 아니야, 크롤리. 하지만 널 계속 아프게 하려고 집에 데려온 게 아니야, 난 그저...”

 

 

“멍이 몇 개 드는 건 ‘아픈 게’ 아니야, 천사야. 믿어줘.”

 

 

크롤리가 침착하게 말했고, 둘은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마침내 아지라파엘이 정말 마지못해하며 대답했다.

 

“가브리엘이 볼지 안 볼지도 모르면서 그저 짐작만으로 널 일부러 멍들게 하진 않을 거야.” 크롤리가 무겁게 한숨을 쉬고 뭐라 반박하려는 걸 무시하며, 천사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가브리엘은 내가 칼라를 쓸 거라고 생각할게 뻔해. 내가...말하자면, ‘직접 손을 더럽히느니’ 말이야.”

 

 

크롤리는 그 말에 약간 얼굴을 찡그렸고, 아지라파엘은 자신이 한 말뜻을 정확히 해야겠다고 느꼈으나 그전에 크롤리가 먼저 대답했다.

 

 

“그래, 그래. 그게 낫겠다. 단계라도 좀 더 높게 맞춰놔, 혹시 모르니까...”

 

 

“안 높여.” 아지라파엘은 논쟁할 가치도 없다는 듯 강하게 말했다.

“내가 찾아낸 이 주문은... 시행하는데... 반시간 정도가 걸려. 그리고 우린 1분전에 미리 경고를 받을 수 있어. 꼭 해야 한다면, 그때 높이면 돼. 그럼 끝이야.”

 

 

크롤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다소 마지못해하며 끄덕였다.

 

 

“얼마 정도면 괜찮을까, 03 이면 되겠지?”

 

 

“적어도 05 로 해.” 크롤리가 단호하게 반대의견을 냈다.

“네가 날 데려올 때 그 단계였잖아. 네가 날 봐준다고 생각할 수도 없게 해야 돼.”

 

 

천국의 깨끗한 바닥에서 떨면서, 겁에 질린 채 아파하던 크롤리가 떠올랐다. 그리고 자신이 겪었던 끔찍했던 고문을 쉽고도 사실 그대로 말하는 친구의 모습에 아지라파엘은 마음이 아팠다. 그는 아지라파엘이 그 고문을 다시 하길 원하고 있었다. 천사는 얼굴을 손으로 쓸더니, 잠시 양손으로 눈을 누르며 떨리는 숨을 뱉었다.

 

 

“수치로 표현할 수 있으면 좋겠다,” 천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느리게 말했다.

“내가 이 계획을 얼마나 싫어하는지에 대해 말이야.”

 

 

크롤리가 아지라파엘의 발밑에서 일어났다. 아지라파엘은 옆의 책더미가 바닥으로 치워지고, 자신의 악마가 그 자리에 앉더니, 자신의 어깨에 한 팔을 위로하듯 두르는 걸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상처를 입고... 연인에게 기꺼이 폭행당하는 쪽이 아지라파엘인 것처럼.

 

 

“알아.” 크롤리가 조용히 말했고, 아지라파엘의 가까운 쪽 손을 들어 입을 맞췄다. 크롤리는 무거운 한숨을 쉬며 천사를 향해 고개를 약간 돌렸다.

“가브리엘이 오면 그렇게 하자,” 아지라파엘은 결국 동의했다. “그때만이야. 칼라를 05 단계로 올릴게.”

 

 

“빨라야 할 거야...”

 

 

“망할 리모컨이 있잖아.” 아지라파엘의 목소리는 혐오로 차 있었다.

“그거면 충분히 빠를 거야.”


크롤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지라파엘은 진심으로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 크롤리가 이 모든 일에 대해 이렇게까지 침착하게 받아들인다는 건 불가능할 거라고 확신하면서도.

 

 

“그건 어딨는데?” 마침내 크롤리가 물었다.

 

 

“침실 서랍에...”

 

 

“갖고 다녀야지.”

 

 

아지라파엘은 뒤로 물러서서 크롤리를 바라보며 반박을 하려 했다.

 

 

“항상.” 크롤리는 단호했다.

“그가 오는 걸 알고 나서, 시간 안에 그걸, 아니, 나를 못 챙기는 일이 있으면 안 되잖아.”

 

 

그 물건을 늘 갖고 있어야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너무나 싫었지만, 아지라파엘은 반박하지 않았다. 크롤리를 끊임없이 위협하면서, 자신들 사이에 권력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걸 계속해서 상기시키는 행동이었다 – 아지라파엘이 아무리 그 권력을 싫어한다고 해도 말이다.

 

 

“뗄 방법을 꼭 찾을게.” 천사가 맹세했다.

 

 

크롤리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다.

 

 

“진짜야.” 아지라파엘은 조용하지만 굳게 주장했다.

“널 구할 방법을 찾을 거야. 영원히 안전할 수 있게.”

 

 

“알았어, 천사야.” 크롤리는 부드럽게 말했으나, 아지라파엘은 친구의 억지로 지은 미소에 담긴 불안함을 놓치지 않았다.

 

 

아지라파엘은 자신이 찾아낸, 서점 근처에 어떤 초자연적 존재라도 감지할 수 있는 마법을 걸었다 – 당연히 그 마법이 실행되는 동안 서점 안에 있는 자신들은 제외하고 말이다. 그렇게 최소한의 미미한 안전장치를 해놓은 후, 아지라파엘은 칼라를 제거하거나 무력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느라 연구를 계속 이어나갔다. 몸을 말고 옆에 붙어있는 크롤리와 함께 소파에서, 가끔 크롤리가 낮잠을 자는 동안은 책상에서.

 

 

그리고 밤이 오면, 아지라파엘은 크롤리가 잠이 들 때까지 안아줬다. 크롤리가 악몽을 꾸지 않도록, 그는 책들을 침대로 가져와 불을 켜놓고 옆에 머물렀다.

 

 

가끔씩 새로운 질문이 떠오를 때마다 아지라파엘은 매뉴얼을 보기도 했다.

 

 

“칼라가...어디 보자, 우연히 손상되는 바람에...떨어진다면 어떻게 되지?”

 

 

물리적으로 칼라를 부숴서 크롤리에게서 떼어낸 후, 가브리엘이 오기 전에 달아나 버리는 선택지도 고려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 ‘사고’는 즉시 본사에 알림이 가고, 악마는 그 즉시 소환됩니다.

 

 

우리가 충분히 빠르면 되지 않을까... 그들이 이게 제거됐다는 사실도 알아차리기 전에 우리가 사라지면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시도했는데, 제거하는 단계부터 실패한다면...

 

 

“칼라를 없애려고 하면 어떤 단계의 처벌을 받게 되지?”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질문했다.

 

 

08 단계의 처벌입니다.

 

 

08 단계의 처벌을 받는 동안, 몸을 떨고 눈물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던 크롤리의 모습이 떠오르자 아지라파엘은 얼굴을 찡그렸다. 만약 크롤리를 구할 수만 있다면 그 정도의 처벌이 가치가 있는지 진지하게 고려해봐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너무나 싫었기에, 그는 눈을 감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얼마나...얼마나 오래?”

 

 

그 상황이 생기면, 대천사님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처벌은 계속됩니다.

 

 

계속된다라. 끊이지 않는 처벌은 크롤리를 완전히 망가뜨려 놓을 수도 있겠지 – 다신 탈출을 시도도 못하도록. 공식적이면서 합리적인 이유는 그럴 거라고 아지라파엘은 짐작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가브리엘의 잔인함 외에는 없다는 생각에 갈수록 확신이 들었다. 칼라의 처벌 아래에 고통스러워하며, 가브리엘이 나타나서 단계를 낮춰 주기만을 기다리는 크롤리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 대천사가 단계를 낮춰 줬을지는 모르겠지만.

 

 

아지라파엘의 머릿속에 짧은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그 가증스러운 물건을 가브리엘이 찬 채, 몸을 떨면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지도 않는 자비를 구걸하는 가브리엘의 모습이.

 

 

너무나도 만족스러운 모습이었다.

 

 

아지라파엘은 애써 그 모습을 머릿속에서 지워내며, 심호흡을 하며 눈을 감았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도움이 되지 않았다. 크롤리가 여전히 가브리엘의 손아귀 안에 있는 한 복수의 환상들은 쓸모가 없었다. 자신은 크롤리의 복수가 아닌, 크롤리를 돕는데 집중해야 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아지라파엘은 크롤리를 주방의 창틀 근처에서 발견했다. 그가 살려낸 작은 식물을 놔둔 곳이었는데, 이 건물에서 자연광을 받기 가장 좋은 장소였던 까닭이었다. 크롤리는 화분을 창틀에서 들어 올려 손에 쥐고 있었다. 선글라스는 옆 카운터에 놓인 채 크롤리의 아름다운 금빛 눈이 완전히 드러나 있었고, 아지라파엘은 그 모습에 기쁘면서도 놀람을 느꼈다. 아지라파엘이 다가가는 동안 크롤리는 화분에 가까이 몸을 기울여, 뭐라 속삭이며 잎들을 살피면서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아지라파엘은 크롤리가 놀라지 않길 바라며 헛기침을 했다 – 어쨌든 크롤리는 깜짝 놀라 조금 펄쩍 뛰더니 아지라파엘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는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않으면서, 눈치를 보며 일어섰다.

 


“얘들한테 말을 걸어야 돼서.” 

그는 조금 변명하듯 말했다. “도움이 되거든.”

 

 

“오, 그래, 당연하지.” 

아지라파엘은 기뻐하며 동의했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은 자라는데 교감이 필요하니까.”

천사는 잠깐 말을 멈추더니 팔을 뻗어 크롤리의 손을 잡았고, 미소는 약간 흐려졌다.

“잠깐 나랑 같이 거실에 갈 수 있어, 얘야? 물어볼 게 좀 생겨서.”

 

 

“그래...” 크롤리의 어조는 방어적이며 조심스러웠다. 카운터에 둔 선글라스에 손을 뻗는 동안, 악마의 표정은 걱정으로 서서히 물들어갔다. 아지라파엘은 참을 수가 없었다. 특히 지금만큼은 크롤리가 자신한테 정직하게 말하는지 꼭 알아야 했다. 크롤리가 선글라스를 집기 전에, 천사는 친구의 손을 잡곤 카운터에서 부드럽게 끌고 왔다.

 

 

“이리 오렴, love, 같이 가자.”

 

 

크롤리는 뭐라 반박하려고 입을 열며 어깨 너머로 선글라스를 바라봤으나, 아지라파엘은 친구의 허리에 팔을 두르더니 거실로 안내하듯 끌고 나갔다. 그는 여전히 크롤리의 손을 잡은 채 소파에 앉았고, 크롤리는 마지못해하며 천천히 옆에 앉았다.

 

 

“무슨 일인데?” 크롤리가 방어적으로 물었다.

 

 

좋아. 멋진 시작과는 거리가 머네...

 

 

“그냥...질문 몇 개만 할게. 칼라에 관한 거야. 내가 그걸 떼어낼 방법을 찾고 있는 거 너도 알지. 근데...내가 방법을 찾을 때까지...그걸 사용은 해야 되잖아. 가브리엘이 우릴 감시하러 돌아다닐 테니까...”

 

 

“그래, 천사야. 계속 그래왔잖아...”

 

 

“그래도 내가 그걸 사용할 일은 없을 거야, 크롤리. 양심적으로, 그게 정확히 어떤지 알지도 모르면서는 못해.”

 

 

크롤리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걸 어떻게 알아내려고.”

 

 

말해 줘.” 크롤리는 아지라파엘을 날카롭게 올려다봤고, 아지라파엘은 부드럽게 친구의 손을 꽉 잡았다.

“너한테 어떤 짓을 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아무리 작더라고 해도 너한테 조금의 고통도 줄 순 없어, 얘야. 부탁이야. 그냥... 말해 주지 않을래? 각 단계가 어떤지?”

 

 

크롤리는 천천히 목을 삼키며 시선을 피했다.

 

 

“지금.” 아지라파엘이 나직하게 재촉했다.

“지금은 가장 낮은 단계잖아. 어떤 느낌이야?”

 

 

“나쁘진 않아.” 크롤리는 약간 어깨를 으쓱했고, 그의 시선은 커피테이블에 쌓인 책과 서류 더미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건 – 요컨대, 백색 소음이야. 머릿속의 정전기 정도. 이젠 거의 느껴지지도 않아.”

 

 

“그러니까... 안 아프단 거지.” 친구의 말이 전혀 기쁘진 않았으나, 아지라파엘은 그렇게 결론을 지었다.

 

 

“응.” 크롤리는 고개를 한번 저으며 단언했다.

“그냥... 두통이 오기 바로 직전 같은? 조이는 느낌이 들고 긴장이 되지만, 그래도...아프진 않아.”

그는 생각에 잠겨 잠깐 말을 멈추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피곤하긴 해. 기적을 쓰는 건... 어려워지지.”

 

 

아지라파엘은 천천히 끄덕였다. “전에 말했잖아, 02 단계는... 정전기가 계속 일어나는 거 같다고...”

 

 

크롤리도 끄덕였다.

 

 

“그럼... 그 이상은?”

 

 

크롤리는 숨을 깊게 마시더니 떨면서 내뱉었다.

“좋아. 01 이 두통 직전이라면, 03 은...약하지만 전신에서 느껴지는 편두통 같은 거야. 머리, 몸, 날개 모두가 욱신거려. 그래도...여전히 움직일 순 있어. 당연히 기적은 못 쓰지만. 그래도...시간이 좀 지나서 익숙해지면...무시할 수 있지. 그렇게 나쁘진 않아.”

 

 

그 말은 아지라파엘에게 “그렇게 나쁘진 않게” 들리지 않았다. 천사는 찡그리며 물었다.

“그럼 05 는 어때?”

가브리엘이 나타날 때 크롤리가 원하는 단계였다. 아지라파엘은 알아야 했다.

 

 

“어...더 나쁘지.” 크롤리는 눈을 감고 힘겹게 목을 삼켰다.

“날 약하게 해. 집중도 못하게 해. 생각을...못하게 하고, 또...뭔가에 오래 집중을 못하게 돼.” 그는 양팔로 제 몸을 감싸며 고개를 숙이고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아지라파엘은 망설였다. 자신이 크롤리에게 할 수 있는 일처럼 들리지가 않았다. 하지만...확실히 알 수 있는 방법이 분명히 있었다.

 

 

“괜찮다면 보여줄 수 있어?”

크롤리는 얼굴을 찌푸리며 천사를 빠르게 올려다봤으나, 아지라파엘은 꿋꿋이 밀고 나갔다.

“네 기억들을 보여줄래?”

 

 

그들이 가진 정신적 연결을 통해, 둘 다 동의만 한다면 크롤리는 기억을 되살려내서 아지라파엘과 나눌 수 있었다. 아지라파엘이 겪는 것처럼. 아지라파엘은 크롤리의 고통을 그대로 느끼게 될 거고, 그 단계에서 크롤리가 어떤 걸 겪는지 정확히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싫어.” 크롤리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단호했다.

 

 

“잠깐이면 돼... 만약 네가 그걸 다시 느껴야 되는 게 이유라면...”

 

 

싫다고 했잖아!

크롤리가 목소리를 높였고, 말은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네가 그것들을 고스란히 느끼라고 내가 그 모든 걸 견뎌낸 게 아니야, 천사야. 네가 그 일들을 겪지 말라고 견뎌낸 거지!”

 

 

압도적인 사랑에 아지라파엘의 심장이 욱신거렸고 그는 참을 수가 없었다.

“아, 미안해... 오, 크롤리.”

천사가 부드럽게 말했고, 제 목소리에 담긴 부드러움과 감사함에 자신의 악마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걸 지켜봤다. 크롤리의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그는 떨리는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천사야. 나-내가 할 수 있을 거 같지가...” 악마는 날카롭게 숨을 들이마시며 고개를 저었다.

 

 

“이리 오렴, 사랑하는 아이야.”

 

 

아지라파엘은 부드럽게 말하며, 몸을 돌려 크롤리를 향해 양팔을 벌렸다. 악마는 망설이지 않으며 빠르게 다가와 아지라파엘의 가슴에 몸을 파묻으며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아지라파엘은 양팔로 크롤리를 껴안고 크롤리의 손을 잡으면서, 그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췄다.

 

 

“이제 안전해.” 천사가 속삭였다.

“나랑 같이 있잖아. 이제 괜찮아. 다시는 그런 아픔을 겪지 않아도 돼, 맹세할게.”

 

 

크롤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떨림이 그의 전신을 훑었고, 그는 고개를 들어 아지라파엘을 바라봤다.

“미안해, 나 진짜... 정말로 빌어먹게 엉망진창이야, 천사야...”

 

 

“그만해.” 아지라파엘이 부드럽게 조용히 시켰다.

“아니야. 어려운 일이고, 네가 얼마나 힘들지 상상도 못하겠어. 그래도... 알고 싶어.”

 

 

“그렇게는 안 할래.” 울고 있으면서도, 크롤리의 목소리는 냉정하고 완고했다.

 

 

“그렇게 안 해도 돼.” 아지라파엘이 시인했다. 크롤리가 선택할 문제였다. 그의 기억이고, 그가 견뎌야 할 고통이니까.



“준비가 되면 말해, my dear.” 아지라파엘은 속삭이며 한손을 들어 크롤리의 이마를 어루만지며 머리카락을 쓸어줬다. “서두르지 않아도 돼.”

 

 

“좋아.” 크롤리는 잠깐 헛기침을 하며 불안정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05 는...대부분 그는 그 단계로 맞춰놨었어. 그가 내 옆...내 옆에 없을 때. 06 이랑 07 은 서로 비슷한데, 그저...훨씬 강도가 세고. 마치...걷거나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근육에 경련이 일어나는 느낌인데, 그게...온몸이 그래. 파도처럼 계속해서 밀려들어와...그는 이 단계는 처벌용으로 아끼곤 했어. 혹시 내가...”

 

 

그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 어깨가 떨려왔다.

 

 

“근데 더 높게 맞춰놨잖아. 내가 널 찾았던 첫 번째 날에.”

아지라파엘은 가슴 속에 쌓이는 분노를 애써 억눌렀다 - 크롤리가 자신에게서 느껴야 할 필요가 가장 없는 감정이었다. “08 로 맞췄었는데.”

 

 

크롤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끊기면서도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가 정말로 열 받았을 때를 위한 거였어. 08 이랑 09 단계는, 둘 다, 모두- 견딜 수가 없어. 인정사정없고 압도적으로 고통스러워. 너-너를 계속, 계속해서 찢어발겨. 숨도 못 쉬고, 움직일 수도 없을 때까지, 그냥...제발 끝나기만을 바라게 돼. 끝날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거 같아. 고작...몇 분만 지나면 그래...”

 

 

그 날 가브리엘의 말을 떠올리자, 아지라파엘은 공포에 질렸다.

 

 

“한번은 10 단계에 몇 시간을 놔뒀다며.”

 

 

크롤리는 아무 말 없이 천천히 끄덕이며, 아지라파엘의 품에 더 세게 파고들면서, 양팔로 더욱 세게 천사를 끌어안았다.

 

 

“만약-만약 08 이랑 09 가 그렇다면...”

아지라파엘은 무슨 대답을 들을지 무서워하며, 정말 간신히 물어야 했다.

“...10 은 어떻단 거야?”

 

 

크롤리는 대답하지 않고 아지라파엘의 품에서 떨기만 했다. 매우 오랫동안 아무 말이 없었기에 아지라파엘은 자신이 대답을 듣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마침내 크롤리는 침묵 속에서 쉰 목소리로 불안에 가득 찬 대답을 했다.

 

 

추락 같아.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모두 빠져나가는 듯했고, 크롤리에게 가해진 고통에 담긴 극도의 잔인함을 깨닫자 아지라파엘은 심장이 산산조각이 나는 느낌이었다. 크롤리가 그런 벌을 받을만한 이유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천사는 자신의 망가진 악마를 더욱 세게 껴안았다. 눈을 감자 눈물이 흘러내렸고, 그는 크롤리의 정수리에 뺨을 맞댔다.

 

 

“미안해.” 천사가 속삭였다. “너무 미안해, 사랑하는 크롤리...”

 

 

크롤리는 대답으로 품안에서 몸을 움직여 아지라파엘의 가슴에 머리를 묻고, 천사에게 절박하게 매달렸다. “못 하겠어,” 그가 마침내 고개를 저으며 속삭였고, 아지라파엘은 크롤리의 뜨거운 눈물이 셔츠를 적시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아, 못 하겠어...”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아지라파엘은 분노를 담아 맹세했다.

“내가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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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롤리가 감방의 차가운 돌바닥에서 정신이 들었을 때, 어둠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고통이 있었다.

 

 

머리는 불이 붙은 것 같았고, 타들어가는 고통은 눈 주변에 집중되어 있었다. 심장이 마구 뛰었고, 가브리엘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했었는지 떠올리자 속이 뒤집혔다. 자신의 얼굴을 향해 들어 올리는 손이 덜덜 떨렸다. 만지기도, 알기도 두려웠다 – 하지만 알아야 했다. 한때 눈이 있었던 곳에 난도질당한 채 녹은 살이 느껴지자 토할 것 같았다.

 

 

공포가 그를 집어삼키기 직전이었다. 순수한 성수로 인한 화상은 그대로 두면 절대로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다. 끔찍하게 엉망이 된 두 눈은 절대 낫지 않을 것이다.

 

 

그는 조심스럽게 일어서서, 두 팔을 뻗고 천천히 돌며, 자신이 정확히 어디 있는지 알아보려고 했다.

 

 

“좋은 아침이다, 예쁜 것.”

 

 

등 뒤 가까이서 들리는 가브리엘의 목소리에는 비웃음과 악의가 담긴 즐거움이 묻어나왔다.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생각하자,크롤리는 부끄러움이 몰려오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끔찍하게 일그러지고 구역질나는 모습일 테니까.

 

 

크롤리는 가브리엘의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몸을 돌렸고, 그의 손이 가브리엘의 가슴을 쳤다. 그는 대천사를 밀어내려고 했으나 눈먼 몸부림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가브리엘은 손쉽게 악마의 양팔을 잡아채곤 그대로 들어 올려서 그를 벽에 밀어붙였다.

 

 

“그만 대들어라, 크롤리.” 가브리엘이 명령했다. 크롤리가 대천사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고 계속 버둥거리자, 대천사는 한숨을 쉬며 그를 끌어내더니 숨도 못 쉴 정도로 세게 벽에 내동댕이쳤다. “잠깐이라도 생각을 좀 해봐라. 날 거의 때릴 뻔 했고, 그럼 칼라의 처벌을 겪게 됐을 거다.” 대천사는 크롤리의 양팔을 한손으로 잡아 가슴에 밀어붙이며 움직이지 못하게 한 후, 가까이 다가와 다른 한손으로 크롤리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그의 말은 조용하고도 은밀했다. “그 후엔, 내가 널 벌하겠지.” 위협으로 가득 찬 목소리가 크롤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어느 쪽이 더 나쁠 것 같나.”



크롤리는 움직임을 멈췄다. 마구 뛰는 심장의 쿵쾅이는 소리가 귀에 울렸고, 공포가 가슴을 파고들며 그에게 싸워, 싸우라고, 맞서 싸우라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완전히, 절망적으로 불리했다.

 

 

“그래야지.” 가브리엘이 부드럽게 달래듯 말했다.

“이제 좀 낫구나...알겠지만, 방금 같은 일이 생길 필요는 없었다, 크롤리. 내가 요구하는 거라곤 예의를 조금 갖추라는 것뿐이니까.”

크롤리의 머리카락에서 손이 떨어지더니 이번엔 그의 턱을 조금 들어 올렸고, 대천사는 조용하고도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제 예의바르게 행동하겠지?”

 

 

크롤리는 머리를 홱 빼내며, 고집스럽게 입을 닫고 대답을 거부했다 – 그리고 보복으로 분명히 날아올 주먹에 마음을 굳게 먹었다.

 

 

주먹은 오지 않았다.

 

 

“글쎄.” 가브리엘의 목소리는 놀랍게도 만족스럽게 들렸다.

“어쨌든, 발전은 좀 한 모양이로군.”

 

 

크롤리는 혼란스러워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가브리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때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아마도 가브리엘은, 자신이 계속 저주의 말을 내뱉는 대신 조용히 있는 모습에 만족한 모양이었다. 그걸 깨닫자 크롤리는 입을 열어 다시 가브리엘을 저주하고 싶었다 – 대천사가 이기게 두긴 싫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에겐 그럴 의지력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젠 너무나도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네놈과 네놈의 애인 아지라파엘에 대해 말해.”

가브리엘의 나직한 목소리에선 비웃음이 느껴졌다.

 

 

“그는 내 애인이 아니야.” 크롤리가 대답했고, 그는 자신의 떨리면서도 약한 목소리가 정말 싫었다. “심지어 친구도 아니야.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난 그를 거의 알지도 못해.”

 

 

가브리엘이 크롤리의 뺨을 만졌고, 크롤리는 예상치 못한 접촉에 약간 움찔거렸다. 아무런 경고도 없이 엄청난 강도의 주먹이 날아왔다. 크롤리가 바닥에 쓰러질 수 있게 가브리엘은 뒤로 물러났고, 크롤리는 엉망이 된 얼굴에 타오르는 압도적인 고통에 숨을 헐떡거렸다. 그 순간 가브리엘의 손이 거칠게 칼라를 움켜잡더니 크롤리를 일으켜 세웠고, 벽 쪽으로 난폭하게 밀어내며 놓아주었다.

 

 

크롤리는 본능적으로 양손을 들어 올리며 방어를 하려 했다 – 하지만 하고 싶어도, 다음엔 어디를 맞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 – 이 방에 가브리엘이 어디 있는지도 정확히 판단할 수가 없었다. 나직하고도 뭔가 미끄러지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가브리엘이 다시 가까이 다가와 한손으로 그의 팔을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이쯤 되면 진실을 말하는 게 자네한테도 최선일 텐데, 크롤리.” 가브리엘이 무미건조하게 말하며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비밀스러운 목소리에는 꾸며낸 동정심이 담겨 있었다.

“왜냐면, 솔직하게 말할까? 네놈이 얼마나 더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거든.”

 

 

크롤리의 숨이 가빠졌고 심장이 쿵쾅댔으나, 그는 남아있던 모든 용기와 반항심을 끌어 모아서 가브리엘의 잘난 체하는, 비웃음이 섞인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해볼 대로 해보시지.” 그는 억지웃음을 지으면서, 나직하지만 분명하게 대답했다.

 

 

가브리엘이 낮고도 즐거운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나를 힘들게 하는군, 안 그런가?” 대천사의 한마디였다. 그는 더 가까이 다가왔고, 크롤리는 대천사의 몸에서 나오는 열기와 피부에 스치는 천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가슴에 다른 뭔가가 느껴졌는데, 매끄러운 가죽 같았다 – 동시에 가브리엘이 몸을 기울여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거라면 네놈을 훨씬 더 예의바르게 만들어 주겠지.”

 

 

대천사가 말하는 동안, 크롤리의 맨살에 눌리는 가죽으로 된 무언가가 – 채찍 같았다; 그는 지옥에서 훈련을 받아왔으니까. - 피부를 태우기 시작했고, 깨달음과 동시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무기는 축성되어 있었다. 가브리엘은 한동안 그걸 대고 있더니, 크롤리에게서 물러나며 손을 뗐다. 대천사는 침착하고도 평온한 목소리로 질문을 반복했다.

 

 

“네놈과 아지라파엘에 대해 말해.”

 

 

크롤리는 목을 삼키면서 몸을 가눴다. “말할 거 없어.”

 

 

가슴에 치닫는 고통 때문에 숨이 멎었다 – 채찍 자체도 살을 베어내며 파고들어갔지만, 채찍질에 뒤이은 화상 때문에 괴로움은 두 배가 되어 타올랐다. 두 번째 매를 맞자, 크롤리는 바닥에 쓰러졌고, 헐떡이면서 어떻게든 도망가려고 소용도 없는 몸부림을 쳤다.



가브리엘은 크롤리를 묶는 수고를 하지 않았다 -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채찍질이 어디서 오는지, 다음엔 어디를 때릴지도 모르는 상태로 크롤리는 매질을 제대로 피할 수가 없었다. 가브리엘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가 없었고 저항도 불가능했다. 계속해서 가브리엘은 같은 질문을 되물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크롤리는 대답을 거부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채찍질이 날아왔다. 크롤리의 온몸이 고통으로 불타올랐고 바닥은 그의 피로 미끈거렸다.

 

 

채찍이 크롤리의 어깨에 감기더니, 그 끝이 목의 옆쪽을 파고들며 찢어버렸다. 그는 숨을 쉬지 못하며 기침을 했고, 애원하듯 한손을 들며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그만해! 사실대로 말하고 있잖아, 제발 그만...”

 

 

순식간에... 가브리엘은 매질을 멈췄다.

 

 

오랫동안 대천사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가브리엘의 손에서 들려오는 채찍이 미끄러지는 소리에 크롤리는 몸을 움찔거렸으나 매질이 다시 날아오진 않았다. 가브리엘의 느리고 정연한 발소리가 들렸고,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크롤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양손을 들어 올리는 거뿐이었다 – 비참할 정도로 소용없는 방어적인 행동이었다. 가브리엘은 크롤리의 목을 잡더니 엉망이 된 등을 거친 돌벽에 세게 밀어버렸다. 크롤리의 고통에 찬 울음소리는 대천사의 손에 막혀버렸고, 대천사는 몸을 기울여 악마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믿음이 안 가는군.”

 

 

크롤리의 심장이 내려앉았고 그는 더 날아올 채찍에 대비를 하려고 했다 – 하지만 고통과 탈진으로 전신이 떨렸고, 한 대라도 더 맞는다고 생각하자 절망이 서서히 그를 집어삼켰다.

 

 

그의 말이 맞아, 넌 더 못 견뎌, 더 이상은 감당 못할 거야, 이 한심한 겁쟁이 같으니...

 

 

하지만 그 순간 가브리엘은 그를 놓아주면서 악마가 바닥에 쓰러지도록 놔뒀고, 대천사의 발소리는 천천히 멀어져갔다. 가브리엘이 나가면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크롤리는 깜짝 놀랐다. 이번에 대천사는 칼라의 단계를 높이지도 않았다. 아마도 크롤리가, 본인이 방금 직접 가한 고통에 더욱 집중하길 원하는 모양이었다.

 

 

지금의 고통에 비하면 칼라의 아픔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눈멀고 무력한 그의 전신이 방금 입은 상처들로 마구 비명을 질러댔다. 크롤리는 바닥에 얼굴을 대고 몸을 둥글게 말았다. 추위와 쇼크로 덜덜 떨면서, 그는 죽음이라는 이름의 자비가 자신에게 오기만을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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