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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session 8

아지크롤아지 가브크롤


가브리엘이 한 말 중 하나는 맞았다.

가브리엘이 크롤리의 심문을 시작한 이후, 상황은 훨씬 심하게 나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대천사의 손짓 한 번에 크롤리를 묶고 있는 사슬이 재배치되더니, 그는 손목이 결박되어 천장에 매달린 신세가 되었고, 발의 앞부분은 밑의 차가운 돌바닥에 닿기 직전이었다. 차가운 공기와, 성가시고 위협적인 축성된 칼날을 이젠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 가브리엘이 크롤리의 옷을 모두 기적으로 없애 버린 덕분이었다.

“어쩌겠나?” 가브리엘이 씩 웃으며 크롤리 주변을 천천히 돌았고, 여유롭고 무해하게 자신의 손바닥에 단검을 가볍게 두드렸다. “기회를 줬는데도.”

 

가브리엘은 크롤리의 이전 고문자들보다 훨씬 창의적이었다.

대천사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실험하듯 여러 곳에, 여러 강도로 단검을 갖다 댔다. 때때로 그는 크롤리의 몸에서 가장 민감한 부분을 피가 흐를 정도로 베곤 했다. 또는, 그저 칼날의 옆면을 크롤리의 맨살에 대고는 한동안 그대로 있기도 했다. 크롤리가 고통에서 숨을 돌릴 수 있도록 잠깐 시간을 준 후, 대천사는 똑같은 질문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아지라파엘을 왜 만났지? 네놈들의 관계는 뭐지? 얼마나 오래되었나?”

 

크롤리의 대답은 가브리엘의 고문보다 창의성이 훨씬 부족했다. 가브리엘은 계속해서 똑같은 두 단어만을 들을 수 있었다. 아, 그래도 가끔씩 크롤리는 단어 몇 개를 조금 섞어서 대답하긴 했다. “꺼져(fuck off)”, “뒈져버려(go fuck yourself)”, “지옥불에나 타버려라, 이 멍청한 새끼야(you fuckwit wanker).”처럼.

 

항상 대답에는 ‘fuck’ 이란 단어가 들어갔다.

하지만 대부분, 질문의 내용이나 횟수와는 상관없이, 바로 전의 극심한 고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크롤리는 가브리엘에게 똑같은 대답을 돌려줬다.


“엿이나 처먹어(fuck you).”

 

크롤리는 자신이 얼마나 여기 오래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 좁고 창문도 없는 감방 안에서 시간을 가늠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고통 또한 시간 가늠을 어렵게 만들었다. 몇 분은 몇 시간 같았다. 며칠은 몇 주처럼 느껴졌다.

이 상황은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으며, 그러니... 크롤리는 망할 시간이 얼마나 지난건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크롤리는 가브리엘의 방문 횟수를 세려고도 했다. 당연히 가브리엘은 악마를 고문하는 것 이외에도 다른 할 일들이 있었다. 그는 대단하신 대천사니까. 그는 천국이 굴러가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었다. 하루에 한번 오는 건가? 며칠에 한번인가? 대천사의 방문 사이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대부분은 칼라 때문이었다.

가브리엘의 첫 번째 방문이 끝났을 때, 대천사는 평온하게, 기적으로 만들어낸 깨끗한 흰 천에 단검을 닦은 후 내려놓았고, 크롤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아주 잠깐이었다. 가브리엘은 즉시 다가와 크롤리의 머리채를 움켜잡아 꼼짝 못하게 한 후, 웃으면서 칼라로 손을 뻗어 단계를 05로 높였다.

참을 만 했다 – 하지만 그뿐이었다. 고통은 그의 집중력을 앗아갔고, 제대로 생각하는 것조차 극도로 어렵게 만들었다. 칼라의 고통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칼라가 없다고 한들, 가브리엘이 만들어준 이 자세로는 괴로워서 잠 못 자긴 마찬가지였을 테지만.

몇 시간 이후든 며칠 이후든, 가브리엘은 마침내 돌아와 칼라의 단계를 낮춰주고, 손을 튕겨 크롤리의 지친 몸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고통이 빠르게 가라앉고 사지의 감각이 천천히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크롤리는 숨을 헐떡였다.

 

가브리엘은 몸을 가까이 기울여 질문을 했다.

크롤리는 지친 미소를 지은 채 대천사를 올려다보며 대답을 했다.

가브리엘 또한 미소를 지으며 단검을 꺼내들었다.


몇 시간이 지난 후, 여전히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한 채, 칼라를 05 단계로 올려놓고서야 대천사는 감방을 떠났다.


시간은 계속되는 고통 사이에서 오락가락 흐를 뿐이었기에 의미가 없었다. 크롤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생각은, 가브리엘이 어떤 짓을 하던 간에 자신은 아지라파엘을 배신하지도, 자백하지도 않으리란 것뿐이었다.

나중에는 그 생각마저도 서서히 흐려졌다. 크롤리가 인지할 수 있는 거라곤, 자신의 몸을 태우는 새하얗고 뜨거운, 끊임없는 고통뿐이었다. 고통은 칼라에서, 수백 개의 화상과 자상에서 쏟아지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가브리엘의 질문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대답은 당연히 불가능했다.

그제야 가브리엘은 단검을 치우더니, 크롤리 곁에 무릎을 꿇어앉았다. 대천사는 악마의 이마를, 차가운 돌바닥에서 떨면서 웅크리고 있는 악마의 몸을 부드러운 손으로 훑었다. 그러자 모든 상처와 고통이 점차 사라져갔다. 크롤리는 마침내 맑은 정신으로, 당황해하며 눈을 깜빡이고 대천사를 올려다봤다. 가브리엘이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단검을 꺼내드는 모습이 보였고, 크롤리는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계속해서 가브리엘은 크롤리가 더 이상 느낄 수도 없을 때까지 고문을 해댔다. 그 후에는 상처를 치유해주고 자백할 기회를 준 후, 모든 과정을 다시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대천사의 실망은 점점 뚜렷해졌다. 그는 점점 잔인해졌고, 차가운 미소는 갈수록 불안정하고 부자연스러워졌다.


“모르겠군, 크롤리. 이 짓을 반복하는 건 정말이지 지겨울 지경이야.” 가브리엘은 격식 없이, 거의 친근하게 말을 꺼냈다. 그러나 그의 눈은 분노로 번득이고 있었다. “자넨 안 그런가?”

크롤리는 두려움에 속이 메슥거렸으나, 개의치 않으며 건방지게 히죽거렸다. “아니.” 악마는 부정하며 고개를 저었다. “네놈한테 엿 먹으라고 말하는 건 언제나 재밌어서.”

가브리엘의 입술이 불쾌함과 분노로 비틀렸고, 그는 주먹을 날려 크롤리의 머리를 벽에 처박아버렸다. 순간 크롤리의 시야가 어둠으로 가득 찼다. 크롤리는 어쩌면 무의식으로 도망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나, 그는 운이 좋지 못했다. 이곳에서 그 정도의 행운은 없었다.

“좋아.” 가브리엘이 으르렁거렸다. 대천사가 손을 튕겼고, 크롤리는 다시 손목이 묶인 채 천장에 매달려버렸다. “말하기 싫다고? 대화는 끝났다.”

가브리엘은 다시 손을 튕겼고, 그의 옆에 작은 테이블이 나타났다. 테이블 위에는 깨끗한 흰 천과, 흰색의 긴 끈 하나와, 물로 가득 찬 하얀 그릇이 있었다.

크롤리는 성수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걱정 마라.” 가브리엘은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안심시켰다. “희석된 거야. 죽진 않을 거다.” 그는 크롤리의 머리채를 다시 그러쥐며 매우 가까이 다가왔다. 대천사의 낮고 분노에 찬 목소리에서 복수의 만족감이 묻어나왔다.

“하지만 네놈을 엿 먹일 거야. 네놈은 차라리 죽길 원하게 되겠지.”

그는 잠깐 동안 뒤로 물러나, 흰 천을 그릇에 담가 물로 흠뻑 적셨다. 그 후 대천사는 크롤리의 뒤로 가서 바닥에 대고 천의 물기를 쥐어짜냈다. 몇 방울이 크롤리의 맨다리에 튀자 악마는 고통으로 쉭쉭거렸고, 헛되이 몸부림쳤으나, 몸무게가 쏠리는 바람에 팔만 삐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가브리엘은 재밌는 듯 소리 내어 약간 웃었다.

가브리엘이 뭘 하려는지 깨닫자마자 크롤리는 대천사를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가브리엘은 훨씬 강했고, 크롤리는 묶인 채 얼마 움직일 수도 없었다. 가브리엘이 악마의 턱을 쥐고 억지로 입을 벌리자 공포가 숨통을 조였고, 곧 젖은 천이 입 안에 쑤셔 넣어졌다. 크롤리는 가브리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을 치며 천을 뱉어내려고 애를 썼다. 고통 때문에 비명이 터져 나왔으나 막혀버렸다. 가브리엘은 테이블에서 가져온 긴 끈으로, 크롤리가 뱉어낼 수 없도록 입과 천을 단단하게 묶어버렸다.

극심한 고통이 크롤리의 입을 파고들었고, 부식성의 액체가 목 뒤를 타고 흘러내리며 몸 안을 태웠다. 크롤리는 헛구역질을 하고 몸부림치며 천을 뱉어버리려고 온갖 노력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가브리엘은 즐거움을 감추지 못하며 그 모습을 한동안 바라봤다.


“좋아.” 대천사는 만족하며 말했다. “입을 어떻게 놀려야 할지 배우게 될 거다.”

 

가브리엘은 그 후 몸을 돌려 나갔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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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길었다고?” 아지라파엘은 당황해하며 크롤리의 말을 따라했다. “얼마나 더 길었는데?”

크롤리는 완전히 넋이 나가 고개를 흔들었다. 좌절감과... 패배감이 들었다.

“더 길었어.” 크롤리는 무력하게 말을 반복했다.

“모르겠어. 이해가 안가... 천국에는 시간이...시간이 다르게 흘러?”

“아니.” 아지라파엘이 대답했다. “보통은 안 그래.”


천사는 생각에 빠져 한동안 조용했다. 그 후 입술을 깨물며 눈에 띄게 망설이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 “천사들이 기억이나 인지능력을 바꿀 수 있긴 해. 아마...네 기억 중 어딘가 거짓인 건 아닐까?”

크롤리는 뺨을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분노와 원한이 뜨겁게 전신을 관통했다.

“진짜였어.” 그는 모욕 받은 기분을 느끼며 딱 잘라 말했고, 자신을 안고 있는 아지라파엘의 팔, 자신의 머리카락 안에 놓인 천사의 손에서 몸을 떨어뜨렸다.

“알았어.” 아지라파엘은 얼른 동의하며 친구를 진정시키기 위해 손을 들어올렸다. 천사의 눈에는 걱정과 죄책감이 들어있었다. “미안해, 크롤리. 네 말을 믿어.”

 

크롤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로부터, 아지라파엘로부터 멀어졌다. 지금 당장은 천사의 곁에 있고 싶지 않았다. 덫에 걸린 듯한 기분이 들었고, 숨이 막혀왔다. 악마는 바닥을 우왕좌왕 걸으며 힘들게 숨을 쉬었고, 한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이해가 안 돼.” 크롤리가 반복해서 말했다. 그는 자신의 떨리는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절망감이 너무나도 싫었다. “이해가 안 된다고...”

“크롤리, 괜찮아.” 아지라파엘은 매우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말했고, 크롤리는 천사가 싫어질 지경이었다... 아주 조금만.

“얼마나 지났는지 뭐가 중요해, 그치? 지금의 너는 안전해. 그래봤자 달라질 것도 없는, 끝나고 지나버린 일에 대해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잖아.”

끝나고 지나버린 일이 아니야.” 크롤리는 중얼거리며 소파에 앉아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절대 안 그래, 끝이랑 가깝지도 않아...”


아지라파엘은 친구의 곁에 다가와 앉았다. 천사는 매우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다. 크롤리는 일어나서 다시 걸어 다니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았다. 아지라파엘이 자신의 등 가운데 손을 가볍게 얹었고, 크롤리는 몸을 빼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알아.” 아지라파엘이 작게 한숨을 쉬며 동의했다.

“우리 모두 아직 위험하지. 가브리엘이 우리가 실수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니. 우린 알면서도 그의 덫 안으로 들어온 거야. 이 상황을 벗어날 길을 찾을 때까지는... 하지만 우린 해결방법을 꼭 찾을 거야, 약속할게!”

 

크롤리의 말은 그 뜻이 아니었다. 아니, 그 뜻이 다가 아니었다.

 

“그냥... 이해가 안 돼.” 크롤리는 반복해서 말하며 아지라파엘을 향해 돌아보았고, 천사의 반응을 슬쩍 봤다. “말이 안 되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천사야, 이거 하나는 확실해... 한 달은 아니었어. 아니었다고.”


크롤리는 아지라파엘의 슬픔과 의심을 느낄 수 있었고, 천사의 표정에서 망설임을 볼 수 있었다. 천사의 침묵이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지라파엘은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내는데 도움을 주기보다는, 크롤리의 말을 의심하고 있었다. 크롤리도 그 사실을 알아챘다. 악마는 절망감을 억누르며 다시 몸을 돌려 손에 얼굴을 묻었다.

 

아지라파엘을 밀어내고 싶은 건 아니었다. 다만 아지라파엘이 이해하길 바랐다.

 

아지라파엘은 빛과 사랑의 현신이었다. 하지만 천사는 또한 현실을 매우 중시하는 학자이기도 했다. 인간의 감정에 관한 한, 천사는 때때로 답답할 정도로 논리에만 초점을 맞추곤 했다. 아지라파엘은 크롤리와는 달리 상상력의 힘을 알지 못했다. 상상은 “현실”에 국한되지 않았다. 간절함이 충분하다면, 순수한 상상만으로도 실재를 창조할 수 있었다. 매우 간절하기만 한다면 누구라도 가능한 일이었다.

 

크롤리는 겪었던 일 중 그 어떤 것도 원한 적이 없었다.

 

“이런,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네.” 마침내 아지라파엘이 부드럽게, 진정시키듯 크롤리의 등을 문지르며 말했다. “하지만 알아낼 수 있을 거야, 얘야. 알아낼 거야.”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천사는 조금 지나치게 밝은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네 기분을 나아지게 할 방법이 생각났어!”


생각을 방해하는 거였다. 천사가 뭘 제안하든 그저 방해일 뿐이었다. 그리고 크롤리는 생각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자신에게 어떤 짓을 저지른 건지, 어떻게 그렇게 길었던 시간이 사라져버린 건지 알고 싶을 뿐이었다.

 

“오늘 네 집에 가는 거 어때?” 아지라파엘의 제안이었다.

“이곳에 한동안 머물러야 되니까 네 걸 좀 가져오는 거야.”

 

크롤리는 천사를 다시 슬쩍 곁눈질했고, 내키진 않았으나 저도 모르게 그 말에 관심이 생겼다. 자신의 플랫이 떠올랐다. 얼마나 비워뒀더라... 빌어먹게도, 얼마나 오래된 건지 이젠 알 수가 없었다. 식물들이 떠올랐다. 한 달 밖에 안 지났다고 한들, 대부분은 죽은 지 오래됐거나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한 달이 아니야... 훨씬 길었는데...

 

아지라파엘은 희망에 차서 유혹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정말 짜증나게도, 그는 크롤리가 자신의 말에 따를 거란 걸 알고 있었다. 천사는 순진하게 덧붙였다. “도 가져오는 거 어때?”

크롤리는 짜증에 차서 날카롭게 한숨을 쉬었다.

좋아, 악마는 방해받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마침내 크롤리가 대답했다. “그래, 좋아. 좋다고.”

“좋아, 정말 잘됐다.”

 

아지라파엘은 만족하며 일어나서 빠르게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크롤리는 그저 멍하게 앉아있었다. 정말이지 너무 심란했다.

몇 분 후, 아지라파엘이 앞에 오더니 손을 맞잡기 위해 팔을 뻗었다.

 

“갈 준비 됐어?”

 

크롤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멍하니 계단을 따라 내려가 문으로 다가갔다. 문에 가까워지자, 아지라파엘은 걸음을 늦추더니, 묘하게 크롤리의 눈치를 보며 걱정스럽게 얼굴을 찌푸렸다. 그 후 천사는 망설이며 미안한 듯 말했다.

 

“My dear, 미안한데... 길거리에 나가기 전에 날개를 숨겨야 되지 않을까?”

 

크롤리는 자신의 날개 상태를 떠올렸다. 한때 아름답고 검게 빛나던 날개는 부서지고 산산조각 났으며, 윤기 없는 잿빛이 되어 있었다. 그러자 굴욕감과 혐오감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지라파엘의 동정심이 느껴졌다. 그 느낌에 가슴이 타오르며 구역질이 났고, 수치스러웠다. 날개는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자신은 완전히 망가진 채 질질 짜는 쓰레기였다... 아지라파엘은 자신이 점점 미쳐간다고 생각할 것이다.

 

어쩌면 사실인지도 몰랐다.

 

잡혀있던 동안 자신이 느꼈던 시간과 아지라파엘이 실제로 흘렀다고 주장하는 시간의 불일치에는, 자신이 미쳤다는 사실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자신은 너무나 무방비했고 너무나 약했다. 이 모든 상황에 분노가 차올랐다.

그리고, 아주 조금은, 아지라파엘에게도 화가 났다.

 

“어, 알아, 나도 그래야 되는 거 잘 알고 있다고. 난 망할 멍청이가 아니야.”

크롤리가 매섭게 말했다.

“할 수만 있다면 안 했겠냐? 망할 칼라 때문에 안 되는 걸 어떡하라고!”

 

크롤리는 날개를 감추려고 해왔다. 오, 얼마나 계속해서 노력했던가. 하지만 가브리엘은 악마가 날개를 감출 수 없도록 칼라를 설정해 놓았다. 당연히 그러면 크롤리를 고문하기 더 쉬울 테니까. 가브리엘은 항상 쉬운 길을 선호했다.

그 순간 아지라파엘의 격렬한 분노가 크롤리의 커져가는 짜증과 좌절을 압도했고, 크롤리는 숨이 멎을 뻔했다. 뜨겁고 깊으며, 압도적인 분노가 느껴졌다. 6천 년간 아지라파엘에게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격렬한 감정이었다. 천사의 분노가 크롤리를 집어삼켰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토할 것 같았다.


멍청하고, 감사할 줄도 모르는 쓰레기 새끼야, 그냥 입 좀 닥치고 있어. 감히 분수도 모르고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아지라파엘은 손을 뻗어 크롤리의 어깨를 감쌌다. 크롤리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손을 앞으로 들어 올렸고, 복종의 뜻으로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크롤리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조용히 말하며 눈을 감았다.

“미안, 그러면 안 됐는데...”

 

“뭘 그러면 안 되는데?” 아지라파엘의 목소리는, 놀랍게도, 부드러우며 슬프게 들렸다. 천사는 손을 마저 뻗어 이번에는 크롤리의 손을 잡았다. 크롤리는 가만히 손을 맡겼다.

“바보 같은 애처럼 나한테 윽박지른 거? 바보 같긴 했는데, 너한테 화난 건 아니야.”

 

크롤리는 놀라서 얼른 아지라파엘을 올려다봤다.

“화-화 안 났어?”

 

아지라파엘의 손은 세고 따뜻했으며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크롤리는 조심스레 천사를 바라봤다. 그는 아지라파엘에게 소리를 지르고, 천사를 바보취급 했다. 용서받지 못할 테지. 당연했다, 언제나 용서받지 못했으니까...

 

“화나는 건 정말 당연한 거야, 크롤리 – 분노하는 건 당연해. 나한테 화가 날 수도 있어. 나 또한 화났다는 사실을 주님께선 아실거야, 나는 심지어...” 크롤리의 표정을 알아챈 아지라파엘은 말을 멈췄다.

“오, 아니, 아니야, 얘야. 너한테 화났단 뜻이 아니야.”

천사는 서둘러 말했다. 크롤리의 착각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너한테 일어난 일에, 그리고 내가 널 도울 수 없는 상황에 화가 난 거야.”

아지라파엘은 크롤리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 크롤리의 남은 한 손도 맞잡았다.

“난 널 절대로 아프게 안 해, 크롤리. 내가, 혹은 네가 얼마나 좌절하고 화가 난다고 해도 말이야.”

천사는 부드럽고 슬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지라파엘의 한결같은 부드러움과 따뜻함에, 크롤리는 갑자기 자신이 어리고 바보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아지라파엘이 자신에게 그토록 화가 날 거라고 생각한 걸까? 그것도 자신을 해칠 만큼 말이다.

크롤리는 아지라파엘에게 가까이 다가가 품에 안기며, 팔로 천사를 감쌌다. 그는 몸을 기울여 아지라파엘의 부드럽고 순결한 입술에 키스를 했다.

 

“미안.” 크롤리는 풀이 죽어 속삭였다.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뜨거웠다.

“나도...나도 사실 너한테 화난 게 아니야.” 악마가 시인했다.

“그냥... 너무 힘들었어. 그게 다야. 미안해.”

“미안할 필요 없어.” 아지라파엘이 안심시켰다. 천사는 생각에 잠겨 살짝 찌푸리며 눈을 돌렸다.

“밖에 잠깐 있을 동안만, 내가 기적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속이면 될 거야.” 천사는 생각에 잠겼다. “가브리엘도 인간들이 날개를 보는 걸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잖아. 어떻게 뭐라 하겠어?”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날 어디로 데려갔는지 물을걸. 무슨 이유로 그랬는지... 그러면 뭐라고 대답할려고?”

아지라파엘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렇네...”


크롤리는 망설였다. 천사는 자신을 도우려고 할 뿐이었고, 아지라파엘에게 화를 낸 자신에게 끔찍함을 느끼고 있었다. 아지라파엘은 그를 보호해주려고 했으나 자신은 천사에게 죄책감만 안기고 있었다. 이 일은 자신이 해결할 수 있었다. 거의 무능하긴 했으나, 할 수 있는 게 하나는 있는 셈이었다.

 

“내-내가 할게.” 크롤리가 망설이며 제안했다.

“칼라가 이 정도로 낮은 단계라면, 내-내가 할 수 있을 거야.”


아지라파엘의 미간의 주름이 걱정으로 깊어졌다. “확실해?”

“응.” 크롤리는 확신할 순 없었으나 일단 끄덕였다. “해-해보고 싶어. 준비된 거 같아.”

 

사실은 아니었지만.


아지라파엘이 택시를 잡았을 때, 크롤리는 지나다니는 많은 사람들의 눈을 속여서 날개를 감춰야 했다. 그 때문에 현기증이 나고 어지러웠다. 택시 안에서도, 그는 운전자 때문에 환각을 계속 걸어야 했다. 길에서보단 훨씬 덜 힘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머리가 쑤셨고, 사지는 무겁고 감각도 없었다. 아지라파엘은 말없이 크롤리에게 팔을 둘러 친구를 받쳐 줬고, 크롤리는 감사해하며 아지라파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는 숨을 깊게 쉬며 몸을 가누려고 애썼다.

 

둘은 플랫의 현관에 도달했고, 크롤리는 마침내 환각을 풀 수 있었다. 크롤리가 쓰러지기 직전이었기에 아지라파엘은 악마를 거의 들고 가다시피 해야만 했다. 매우 걱정스러워 하며, 아지라파엘은 가장 가까운 자리인 탁상 뒤의 의자로 크롤리를 끌고 가, 부축하며 앉혔다.

 

“이제 괜찮아, 얘야. 그냥 쉬렴.” 아지라파엘은 부드럽게 말하며 크롤리의 머리 위에 입을 맞췄다. “가방은 내가 쌀게. 내가 빼먹지 않게, 원하는 게 있으면 말만 해줘.”

 

크롤리는 지쳐서 고개만 끄덕였고, 몸을 숙여 책상에 팔을 접어 얹고 머리를 그 속에 파묻었다. 그 때만큼은, 아지라파엘이 뭘 골라오든지 관심도 없었다. 그저 숨을 골라야 했고, 어지러움이 가실 때까지 기다리면서 쉬어야 했다. 침실에서 아지라파엘이 서랍과 캐비닛을 여닫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몇 분 후, 어지러움과 중압감이 가시기 시작했다. 크롤리는 고개를 들어 나른하게 눈을 깜빡였고, 너무나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친숙한 방을 둘러보았다. 식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이 시들고 여기저기 갈색으로 변해있었고 그 모습에 크롤리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들은 엉망진창으로 자라고 있었고, 어떤 식물도 떨지 않았으며 조금도 두려워 보이지 않았다.

 

네가 얼마나 한심해 보이겠어, 친구야. 크롤리의 잠재의식이 친절하게도 말했다. 넌 이제 전혀 위협적이지도 않아, 더 이상은.

 

크롤리는 책상으로 시선을 내리며 깊게 한숨을 쉬었다.

 

약하고, 한심하고... 빌어먹게도 미쳐가는구나.

 

그는 침실 쪽으로 곁눈질을 했다. 아지라파엘이 분주하게 가방을 싸고 있었다. 크롤리가 했다면 쉽고 간단하게 끝났을 일이었다.

 

천사도 얼마 못가 지칠걸. 이 도움도 안 되는...짐덩어리한테. 지친다고 해도 계속 내 옆에 있어주겠지. 아지라파엘이니까. 친절하고 따뜻하고 상냥하게 옆에 있어줄 거야... 계속 널 뒤치다꺼리해 주겠지...

너한테 싫증이 날 때까지.


크롤리는 점점 심해지기만 하는 자책감에 눈물이 차올랐고, 눈을 깜빡여 물기를 털어냈다.


봤지? 약해빠져서는. 쓸모도 없고 한심하기까지 하네. 천사한테 무슨 쓸모가 있겠어?

 

크롤리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고, 분노에 차서 눈물을 닦아냈다. 그래봤자 소용없었다. 아지라파엘은 크롤리를 너무 잘 알고 있었으니까. 침실에서 나오기만 하면, 아지라파엘은 악마가 울고 있었다는 걸 알아챌 것이다. 천사는 알아챌 거다. 가슴이 아플 정도로 다정하게,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인내심으로 크롤리를 기다려줄 것이다.

순간 크롤리에게 뭔가가 떠올랐다 – 그는 얼른 손을 아래로 뻗어 오른쪽 위 길쭉한 서랍을 열었다. 그 속의 내용물을 보자 깊은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여섯 쌍의 검은 발렌티노 선글라스가 들어있었다.

크롤리는 힘겹게 목을 삼키곤 한 쌍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디테일 하나하나를 음미하듯 한동안 본 후에야 선글라스를 썼다. 세계는 순식간에 그늘이 졌고, 크롤리에게는 숨 쉬는 것만큼이나 익숙한 모습이었다. 엄청난 안도감이 밀려왔고 그는 조용히 떨리는 한숨을 내뱉었다. 단순히 선글라스를 썼을 뿐인데, 그 행동 하나에 제자리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얼마나 오래됐는지 모르겠지만, 그 일 이후 처음으로... 크롤리는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예전의... 자기 자신이 어땠는지 기억이 났다.

이젠 적어도,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간 상상은 할 수 있는 셈이었다.

 

할 수 있어. 크롤리는 스스로에게 중얼거리며, 어깨를 곧게 펴고 불안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해야 돼, 수없이 해온 일이야. 만약 못한다면... 하는 척이라도 해야 돼.

거짓말도 수없이 해왔잖아.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이 일만큼은 해내야 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그게 전부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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